세월호 사건 이후, 나를 오래도록 괴롭힌 감정은 (아이들에 대한)슬픔과 (책임자 어른들에 대한)분노보다도 죄책감이었다.
'침몰하는 배 속에 내가 있었다면... 내 구명조끼를 벗어서 아이들에게 입혀줄 수 있었을까...'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이 가정을 자주 하고는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반복되는 상상 속에서 가끔은 구명조끼를 벗어 눈 앞에 있는 아이에게 입혀줄까도 했지만, 결국엔 매번 그 구명조끼를기어코 내 양팔에 끼웠다.
실제로 어느 선생님들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아이들에게 양보해서 살리고 생을 마감하셨다. 사람들은 이런 귀한 의인들보다도 속옷바람으로 제 몸 하나 보신하려고 구조선에 올라타는 선장에 대한 비난에 더 집중했던 것도 같다. 어린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는 책임자에 대한 비난도 차마 하기가 힘들었다. 비난하려다가도 속옷바람으로 정신없이 몸 보신하는 비겁한 선장이 나 자신인것 같아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더욱 깜깜하고자 눈을 질끈 감곤 했다.
몇달 후 인적이 뜸해진 시청 앞 분향소에 향을 태우고는 한참을 묵념하다, 어디 지켜보고 있던 기자에게서 희생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냐는질문을 들었다.
서경식 선생의 제자 하마무씨는 선생의 수업에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들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간토대지진 때처럼 조선인을 죽이자고 이 강의실에 누가 들어왔을 때 이 방에 있는 학생 중 누군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도 조선인을 죽이자는 무리에 들어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늘 합니다. 이러한 걱정과 공포가 과도한 것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략) 독일 시민은 나치가 한 짓을 몰랐다고,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몰랐을까요? 이웃 유대인들이사라지는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p. 221-222)
여기에 대해 하마무씨는 이런 상상을 했다.
"선생님을 지키고 싶다. 그러다가 나도 죽으면? 아니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방관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다. 왜 내가 지켜 줄 쪽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순간 나는 내가 다치지 않는 위치에서만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권력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선생님은 현실적인 공포 속에서 산다. 누군가에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억압을 당할 위협을 항상 느끼면서 산다. 그 입자을 여성으로 바꾼다면? 퀴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중략) 권력은 위대한누군가가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고 내 속에 있다. 그때 나의 가해자성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p. 222)
일본 유학을 8년 정도 한 적이 있는 나는, 이상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서경식 선생의 저 가정이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는다. 아니, 꼭 '일본'과 '조선인'의 예가 아니라도 우리 삶 일상에서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마녀사냥과 '타인만들기'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소수라는 이유로 얼마나 쉽게 피해자가 되는가. 가해그룹의 선두에 서지 않더더라도, 가해자 표명을 하지 않는 이상 자동적으로 피해자 그룹에 속해버리는 분위기라면, 나는 또 얼마나 말을 얼버무리며 어정쩡하게 가해 그룹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던가.
세월호 사건과 일상 속 소수에 대한 차별은 언뜻 다른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자신이 사건이든 편견이든 맞닥뜨렸을 때, 내 보신과편의, 그러니까 물리적 생존과 사회적 생존을 위해 약자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기 쉽다는 점에서, 내 안에서는 매락이 통하는 일들이다. 재일조선인, 성소수자, 장애를 가진 사람,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내 아이와 친구가 될) 다문화 가정 아이들, 보육원 아이들, 환경문제... 내 '바쁜' 일상에 '귀찮고' '머리아픈', 못본 척 외면해버리고 싶은 일들이다.
포시랍게만 자라지는 않았던 나는 소수가 되는 경험도 종종 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눈에 띄는 상처들과 (수술을 위해)밀어버린 민머리로 20대의 몇 년간은 장애를 가진 사람의 취급을 받기도 했고, 부유한 여학생들이 유달리 많았던 여대 대학 시절에는 또각구두 소리가 재잘대던아름다운 봄 캠퍼스 한 구석에 앉아 학자금마련에 가슴 쓰라려하던 고학생이기도 했다. 장학금을 받고 가게 된 일본 유학시절에는 과거 '식민지'에서 온 열등한 사람으로 '일부' 일본인들에게 억울한 일도 아주 '가끔' 겪기도 했다. (물론 좋은 인연이 훨씬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소수의 아픔에 대해 경험조차 못해본, 아주 몰이해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소수의 고통에 선뜻 연대하고동참하기가 힘들다. 못 본척하고 주저할 때가 많다. 솔직히 말하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할 때가 오는 것이 두렵다.
그런데 이것이 서경식을 다시 읽어야하는 이유다.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할 때가 올 때,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잠재적이고 소극적인 가해자가 되어 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때까지 서경식 선생의 글과 그에게 연대하는 '작은 자의 슬픔'을 아는 자들의 글을 계속 읽고 싶다. 그들의 글들이 못본 척 자꾸 고개를 떨구는 나를 다시 고개들어 보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경식 선생의 부인 후나하시 유코씨가 남긴 아름답고 가슴 아픈 말씀을 적는다.
"나는 서경식 씨와 만나서 가치관과 생활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알게 되는 것, 배우는 것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그래도 시대는 돌고 도는군요. 지난 총선거에서는 예상을 크게 웃도는 수준으로 자민당이 압승했습니다.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는 날이 다시 찾아오는 걸까요. 그런 날과 맞닥뜨린다면 피해를 입고 싶지 않습니다. 동시에 지금도 일본인으로서 가해의 역사적 책임을 안고 있는 저는 다시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지우고 싶습니다." (p.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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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간토대지진 때처럼 조선인을 죽이자고 이 강의실에 누가 들어왔을 때 이 방에 있는 학생 중 누군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도 조선인을 죽이자는 무리에 들어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늘 합니다. 이러한 걱정과 공포가 과도한 것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략) 독일 시민은 나치가 한 짓을 몰랐다고,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몰랐을까요? 이웃 유대인들이사라지는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P221
선생님을 지키고 싶다. 그러다가 나도 죽으면? 아니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방관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다. 왜 내가 지켜 줄 쪽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순간 나는 내가 다치지 않는 위치에서만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권력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선생님은 현실적인 공포 속에서 산다. 누군가에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억압을 당할 위협을 항상 느끼면서 산다. 그 입자을 여성으로 바꾼다면? 퀴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중략) 권력은 위대한누군가가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고 내 속에 있다. 그때 나의 가해자성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P222
나는 서경식 씨와 만나서 가치관과 생활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알게 되는 것, 배우는 것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그래도 시대는 돌고 도는군요. 지난 총선거에서는 예상을 크게 웃도는 수준으로 자민당이 압승했습니다.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는 날이 다시 찾아오는 걸까요. 그런 날과 맞닥뜨린다면 피해를 입고 싶지 않습니다. 동시에 지금도 일본인으로서 가해의 역사적 책임을 안고 있는 저는 다시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지우고 싶습니다.- P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