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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서연님의 서재
  • 밤의 공작새
  • 헤르만 헤세
  • 22,320원 (10%1,240)
  • 2026-03-20
  • : 3,510


어떤 이야기는 짧지만, 그 안에 평생 잊히지 않을 한 장면을 품고 있다. 헤르만 헤세가 1911년에 발표한 단편 「밤의 공작새」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번에 가나출판사 '사이그림책장' 시리즈의 두 번째 책으로, 엄혜숙의 번역과 오승민의 그림이 더해져 그림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 소년이 가장 사랑하던 것을 망가뜨리던 날

이야기는 어른이 된 하인리히가 친구의 서재에서 나비 수집함을 마주하며 시작된다. 그는 머뭇거리다 어린 시절의 한 사건을 털어놓는다. 나비 채집에 푹 빠져 있던 열두 살 소년이 옆집 모범생 에밀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공작 나방'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그 나방을 손에 쥐고 마는 이야기다. 그러나 떨리는 손끝에서 공작 나방의 날개는 찢어지고, 더듬이는 부러지고 만다.

헤세는 이 짧은 이야기 안에 욕망과 질투,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한번 망가뜨린 것은 결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빼곡히 새겨 넣는다. 미화하지 않는 정직한 시선이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깊게 건드린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손으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망가뜨려 본 기억이 있지 않을까. 그 순간의 떨림과 무너짐을, 헤세는 백 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에게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오승민의 '눈', 이야기의 또 다른 층위

이 그림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오승민이 텍스트를 그저 따라가지 않고, 자기만의 해석으로 이야기의 또 다른 층을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 전반에 걸쳐 '눈동자'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하인리히의 눈, 공작 나방 날개에 새겨진 눈, 하인리히를 차갑게 바라보는 에밀의 눈. 그 눈들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끝내 숨기고 싶었던 본능과 욕망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색의 운용이다. 어린 시절 나비를 좇던 숲은 눈부신 초록빛으로 찬란하게 펼쳐지지만, 에밀이 등장하면서부터 그 초록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공작 나방을 훔치러 가는 계단 위의 불안한 그림자, 마침내 마주한 나방을 바라보는 소년의 흔들리는 눈동자—오승민은 단순한 어둠과 밝음의 대비를 넘어 그 사이의 미묘한 영역을 포착해 낸다. 클라이맥스에서 종이 띠가 떼어지고 공작 나방의 네 개의 눈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정말로 책장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무수한 무늬와 선들이 마치 무의식 깊은 곳에 쌓인 감정의 지층처럼 겹겹이 포개져 있다.




파괴 끝에 남는 것

하인리히가 부순 것은 단지 한 마리의 나방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한 조각이자, 동시에 자기 안의 어두운 본능이기도 하다. 양면적인 이 둘을 모두 부순 자리에서 비로소 소년은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날 준비를 한다. 공작 나방은 그래서 단순한 곤충이 아니라, 성장의 통과의례가 된다.

『밤의 공작새』는 어른이 되어 가는 길목에서 누구나 한 번쯤 통과해야 하는 그 어두운 방을 그림책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열어 보여 준다. 초등 고학년이나 청소년 독자에게는 자기 안의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는 거울이 될 것이고, 어른 독자에게는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가 될 것이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그림이 글의 의미를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책. 헤세의 문장과 오승민의 그림이 만나 만들어 낸 이 고요하고도 강렬한 그림책을, 천천히 한 장씩 넘겨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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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야기는 짧지만, 그 안에 평생 잊히지 않을 한 장면을 품고 있다. 헤르만 헤세가 1911년에 발표한 단편 「밤의 공작새」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번에 가나출판사 '사이그림책장' 시리즈의 두 번째 책으로, 엄혜숙의 번역과 오승민의 그림이 더해져 그림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 소년이 가장 사랑하던 것을 망가뜨리던 날

    이야기는 어른이 된 하인리히가 친구의 서재에서 나비 수집함을 마주하며 시작된다. 그는 머뭇거리다 어린 시절의 한 사건을 털어놓는다. 나비 채집에 푹 빠져 있던 열두 살 소년이 옆집 모범생 에밀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공작 나방'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그 나방을 손에 쥐고 마는 이야기다. 그러나 떨리는 손끝에서 공작 나방의 날개는 찢어지고, 더듬이는 부러지고 만다.헤세는 이 짧은 이야기 안에 욕망과 질투,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한번 망가뜨린 것은 결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빼곡히 새겨 넣는다. 미화하지 않는 정직한 시선이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깊게 건드린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손으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망가뜨려 본 기억이 있지 않을까. 그 순간의 떨림과 무너짐을, 헤세는 백 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에게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오승민의 '눈', 이야기의 또 다른 층위

    이 그림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오승민이 텍스트를 그저 따라가지 않고, 자기만의 해석으로 이야기의 또 다른 층을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 전반에 걸쳐 '눈동자'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하인리히의 눈, 공작 나방 날개에 새겨진 눈, 하인리히를 차갑게 바라보는 에밀의 눈. 그 눈들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끝내 숨기고 싶었던 본능과 욕망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특히 인상적인 것은 색의 운용이다. 어린 시절 나비를 좇던 숲은 눈부신 초록빛으로 찬란하게 펼쳐지지만, 에밀이 등장하면서부터 그 초록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공작 나방을 훔치러 가는 계단 위의 불안한 그림자, 마침내 마주한 나방을 바라보는 소년의 흔들리는 눈동자—오승민은 단순한 어둠과 밝음의 대비를 넘어 그 사이의 미묘한 영역을 포착해 낸다. 클라이맥스에서 종이 띠가 떼어지고 공작 나방의 네 개의 눈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정말로 책장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무수한 무늬와 선들이 마치 무의식 깊은 곳에 쌓인 감정의 지층처럼 겹겹이 포개져 있다.

    파괴 끝에 남는 것

    하인리히가 부순 것은 단지 한 마리의 나방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한 조각이자, 동시에 자기 안의 어두운 본능이기도 하다. 양면적인 이 둘을 모두 부순 자리에서 비로소 소년은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날 준비를 한다. 공작 나방은 그래서 단순한 곤충이 아니라, 성장의 통과의례가 된다.『밤의 공작새』는 어른이 되어 가는 길목에서 누구나 한 번쯤 통과해야 하는 그 어두운 방을 그림책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열어 보여 준다. 초등 고학년이나 청소년 독자에게는 자기 안의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는 거울이 될 것이고, 어른 독자에게는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가 될 것이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그림이 글의 의미를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책. 헤세의 문장과 오승민의 그림이 만나 만들어 낸 이 고요하고도 강렬한 그림책을, 천천히 한 장씩 넘겨 보시길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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