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고상한 비극에서 당당한 역할을 맡거나 우아한 희극에서 짧고 쉬운 역할을 맡거나 익살극에서 유쾌한 광대 역할을 맡는데, ‘운명’이라는 무대감독이 왜 나한테는 고래잡이 항해의 이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면 교활하게도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 앞에 나타나 그 역할을 맡게 한 여러 가지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그것들은 나를 속여서, 내가 확고부동한 자유의지와 뛰어난 판단력으로 그 역할을 선택했다는 망상에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