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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님의 서재
  • 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 10,800원 (10%600)
  • 2021-04-10
  • : 2,687
실존주의의 매력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 즉, 정직한 인식과 정직한 반응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른 채 연기를 한다. 오랜 세월 병원 신세를 진 어느 노인은 여러 경로로 아주 여러 번 영접을 했다고 한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일말의 신에 대한 신뢰나 감격, 감동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그가 아주 여러 번 영접을 하게 된 근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 영접의 순간은 어느 누군가에겐 간증이라는 신앙적 논거의 경험이 되기도 한다. 상황에 대한 해석이 참 자의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끔 환대와 환송, 기쁨과 슬픔 속에서도 연극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다른 것이 끼어있지 않은 순정의 마음을 잃은 우리는, 환송도 환대도, 기쁨도 슬픔도, 감동과 경악도 답습된 관성에 따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문학과 철학으로 유명하다는데 사르트르의 소설은 읽었어도 보부아르의 글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실존적 존재들에겐 해결되지 않는 애매성들이 있고, 그 딜레마는 삶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보부아르의 입장이라고 한다. 그게 모든 것이 해결되고 결말이 선명하다는 말보다 더 정직하게 들린다고 하면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실존하고자 하는 것은 삶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이다. 이게 왜 무신론자들의 입장이 되었는지부터가 이미 유신론자인 나에겐 크나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때론, 유신론자들의 삶이 실존주의자들보다 더 열정적이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 또한 딜레마이다. 똑같은 문장들만 반복되는 세계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가 창조된 자신의 얼굴을 지워버리란 얘기는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길게 하려니 이론이 빈약해서 어렵다. 그러나 파커 J 파머의 능산적인 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보부아르의 실존주의의 윤리적 가능성 등이 한 궤로 읽힌다. 그것은 한편으로 예수님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별성과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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