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살인범이 아니야.
난 걸레고, 그건 무죄를 받아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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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스무 살 대학생 아비바는
정치인 지망생으로서 실무 경력을 쌓기 위해
지역 하원의원 에런 레빈의 선거사무소에
인턴으로 들어간다.
인터넷 활용 능력을 인정받은 아비바는
각종 조사 업무를 도맡아 하게 되고,
의원과 만날 기회가 늘어나면서
불륜 관계로 발전한다.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의원의 차가 교통사고에 휘말리고,
불운하게도 당시 아비바가 조수석에 타고 있었던 탓에
두 사람의 관계가 만천하에 공개된다.
곧바로 언론의 집요한 취재 공세와
흥미 본위의 신상털이가 시작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비바가 블로그에 쓴
은밀한 사생활까지 유포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지나 세간의 관심이 사그라든 뒤에도
인터넷에 흉터처럼 새겨진 흔적들은 지울 수 없었고,
취직을 하려고 해도 나빠진 평판 탓에
이력서를 내는 족족 고배를 마신다.
실의에 빠진 아비바는
결국 쪽지만 남겨두고 가출하다시피 집을 떠난다.
그리고 15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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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숙한 상황, 편향된 후폭풍
미래의 대권 주자를 노리는 전도유망한 유부남 국회의원과 그 선거사무소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인턴의 스캔들이 터진다.
여성 인턴의 이름을 따서 속칭 '아비바 게이트'라 불리게 된 그 스캔들은 자극적인 가십거리로 소비되고, 여론의 돌팔매질을 당하며 집요하고 저속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살아온 세월은 아비바의 두 배에 이르고, 공직자로서 분별력을 갖추었어야 마땅할 정치인은 별 탈 없이 의원직을 유지한다. 심지어 '행실이 단정치 못하고 몸매는 좀 많이 풍만하지만 얼굴이 예쁘장한' 앙큼한 여자애의 꼬임에 넘어가 유능한 정치인이 몰락했다고 여기는 대중의 동정 어린 시선 속에 잇달아 재선에 성공해, 나중에는 무려 10선 의원이 되기까지 한다.
반면 인터넷 기록이라는 현대의 주홍글씨를 달게 된 아비바는 취직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몰리고, 그녀의 삶은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든다.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대강 상상이 갈 만큼 친숙한 구도다. 작중에서도 언급되는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터진 각종 성추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마녀사냥에 가까운 신상털이, 슬럿 셰이밍(slut-shaming, 옷차림이나 품행을 이유로 '동정받을 가치가 없는 피해자'로 낙인찍는 것), 인터넷을 이용한 가해 행위(리벤지 포르노, 몰카 공유) 등도 최근 들어 사회적 이슈로 급부상한 여성 인권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캔들이 터지기 전, 아비바가 정치인을 꿈꾼다는 것을 알고 딸의 공직 취임 석상에서 빨강 파랑 하양이 어우러진 에르메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을 상상했던 아비바의 어머니가 시장 선거일에 흰옷을 차려입고 딸(붉은색 정장), 손녀(파란 원피스)와 함께 투표소로 향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자유 민주주의 사회 성립의 주춧돌이 된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 삼색기를 떠올리게 한다.
2.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
아비바의 어머니 레이첼은 이혼 후 온라인 소개팅 사이트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첫 데이트에서 남자는 아비바가 그녀의 딸인 줄 모르고, 심심풀이 잡담으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내 보기에 그 여자앤 권력과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달려든 거예요. 아니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거나. 행실이 단정치 못하고 몸매는 좀 많이 풍만하지만 얼굴이 예쁘장한 그런 여자들 있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나 된 줄 알고 레빈 같은 남자를 꾀려고 했던 거죠. 난 그런 사람들한테는 영 동정심이 안 생겨요.
(...)
진짜 수치였어요. 레빈은 입지가 탄탄한 하원의원이었거든요. 그 여자애만 아니었다면 레빈은 첫번째 유대계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는데.」
곧바로 남자를 차버린 후, 아비바의 어머니 레이첼은 이렇게 한탄한다.
「사람들은 재수없는 온라인 미팅남 루이스처럼 생각한다. 몇몇 자극적인 문구만 기억한다. 자신이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자신이 누군가의 딸자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레빈은 성인 남자이자 선출직 공무원이고 내 딸은 사랑에 빠진 철부지였는데, 레빈은 결국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내 딸만 두고두고 회자되는군. 뭐야,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그 애가 또다른 꼰대의 농담거리가 돼야 하는 거지?」
인터넷에서 상처받는 말들이 오갈 때, 우리는 말한다. '모니터 뒤에 사람 있다'라고.
우리가 무심코 화제에 올리는 사람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고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일 텐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가끔 잊곤 한다. 책 띠지에 적힌 「이중잣대, 2차 가해, 잊힐 권리」라는 태그가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3. 변화하는 시점, 입체적인 스토리
앞서 소개한 줄거리는 책 내용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페이지는 그 스캔들로부터 15년 후의 이야기에 할애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다섯 명으로, 챕터가 바뀔 때마다 달라진다. 공통점이라면 전원 여성이라는 것.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는 딸의 날벼락 같은 고백을 들어야 했던 아비바의 어머니 레이첼을 첫 타자로
행사 기획자로 일하는 30대 싱글맘 제인과 그녀의 조숙한 딸 루비,
평생 남편 곁을 지키며 온갖 뒤치다꺼리를 해온 의원의 아내 엠베스,
그리고 모든 파문의 중심인 아비바.
폭넓은 연령대에 걸친 여러 여성들의 시점에서 이메일이나 선택형 게임북 등 다양한 형식으로 서술하여 하나의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4. 그럼에도 경쾌하고 따스한 희망의 찬가
민감한 주제를 내걸었기에 비판적이고 날선 내용일 줄만 알았는데, 예상외로 건강하고 긍정적인 이야기였다. 신물 나게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는 데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머러스하고 소탈하며, 때로는 깊은 공감과 감동을 선사한다. 설령 끝났다고 생각될지라도 삶은 계속되며, 굴곡진 생에도 가능성은 늘 열려 있음을 진정성 있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려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을 찾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서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들의 모습이 눈부시다.
덤으로 심각해질 만하면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유머와 진실된 말들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훈훈하고 유쾌하게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예컨대 어린 루비가 해외 펜팔을 하면서 어려운 영어 단어를 자기 식으로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부분이라든가, 아이를 유산했다고 말하는 산모에게 건네는 따스한 위로 같은 것들이 그렇다.
「엄마 말이, 사람들이 엄마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여기는 이유는 결혼식이나 각종 행사가 사람들한테 '친밀감의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래. '친밀감의 환상'이란 사람들이 '자제력을 내려놓는다'는 걸 뜻해. '자제력을 내려놓는다'는 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말하고 마시고 끌어안는다'는 뜻이야.」
「모건 부인은 '사교계 명사'야. '사교계 명사'라는 건 '와인을 마시고 자선행사를 열고 다른 사람들 일에 간섭하는 부자 할머니'를 뜻해.」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우리 엄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하거나, "저런……" 하거나, 아니면 아무 말 없이 '위로의 몸짓'을 건네면 된다고 했어. 나는 살며시 프래니 손 위에 내 손을 포갰어.」
5. 삶 속에서 끝없이 거듭나는 존재, 인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생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때로는 변화를 강요하기도 한다. 손쓸 수 없이 죽어버린 듯 보여도 다시 살아나 꽃을 피우는 난초처럼, '끝없는 게임' 속에서 재차 새로운 시작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나타낸 구절이라고 생각하기에, 작중에서 인용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오는 말을 끝으로 서평을 마친다.
「인간은 어머니가 낳은 그날 영구히 태어나는 게 아니다. 생은 인간 스스로 자꾸 거듭 태어나게 만든다.」
비바, 제인
저자 개브리얼 제빈
출판 루페
발매 2018.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