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은 신념이 아닌 전략
배정화 2025/11/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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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의 대변자, 달라이 라마
-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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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 202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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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대변자, 달라이 라마』는 흔히 알려진 ‘영적 지도자의 회고’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 책은 한 민족의 존속을 둘러싼 정치적 선택의 기록이며, 동시에 한 개인이 역사 앞에서 어떻게 결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달라이 라마가 75년간 견지해 온 비폭력 노선은 윤리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 정치 속에서 끊임없이 조정되어 온 전략적 판단의 결과였다.
1950년 중국의 침공 이후 티베트는 국제 정치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달라이 라마가 이 회고록에서 보여주는 것은 ‘침략의 비극’이 아니라 그 비극 속에서 어떤 선택지가 실제로 가능했는지에 대한 냉정한 검토다. 무장 저항이 장기적으로 민족 전체를 소멸로 몰아넣을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가 선택한 비폭력은 도덕적 고결함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생존 방식이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달라이 라마가 스스로를 피해자나 성인으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 지도부와의 협상, 국제 사회의 방관, 망명 정부 내부의 갈등 등을 서술하는 방식은 감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계산적이다. 그는 분노보다 균형을 택하고, 도발보다 지속 가능성을 택한다. 이것이 이 회고록이 단순한 자전적 서사가 아니라 정치사적 기록으로 읽히는 이유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티베트 문제’를 영토가 아닌 ‘문명’의 문제로 인식하는 시선이다. 이는 단순한 자치 요구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질서가 사라지는 과정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티베트의 소멸은 곧 하나의 인식 체계가 인류사에서 사라지는 사건이며, 이는 어떤 국가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그는 집요하게 강조한다.
이 책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정의는 언제 실효성을 갖는가.
저항은 어디까지가 윤리이고 어디부터가 파괴인가.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한국 사회에도 자연스럽게 닿는다. 분단과 냉전, 권력과 저항의 경험을 지나온 독자라면 이 물음을 결코 추상적인 사변으로만 받아들여지진 않을 것이다.
『티베트의 대변자, 달라이 라마』는 독자의 감정에 기대기보다 판단을 요구한다. 비폭력의 한계, 타협의 윤리, 그리고 정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사고하게 만든다. 이 책의 미덕은 답을 제시하지 않고, 사유의 좌표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폭력이 유효한 수단처럼 소비되는 시대, 이 책은 비폭력이라는 느린 선택이 결코 나약한 이상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판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판단은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현실 정치와 역사 속에서 끝까지 검증된 선택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티베트의 대변자, 달라이 라마』는 한 개인의 회고를 넘어선다. 이는 권력, 저항, 존엄을 둘러싼 인간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 묻게 하는 기록이며,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요청하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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