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미르, 소희, 바우
"우리 사촌오빠 있잖아요, 엄마랑 아빠가 이혼했대요. 그래서 오빠는 엄마랑 산대요."
여름방학이라 집에 놀러온 조카 아이가 과일을 깎는 내게 다가와 대뜸 이야기한다. 왜? 물으니 몰라요. 하더니 잠시 있다 덧붙인다. 중국 사람이라 말이 안 통했나?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말이 안 통하니 마음도 안 통했을 지도.
이제 열살인 그 아이는 부모님의 이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얼마 전에는 아내 없이 아이를 키우던 50대 후반 남성의 부고를 전해들었다. 암이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이제 중학생인데 혼자가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울지도 않고 멍하니 있었다던 아이. 남겨진 재산보다 채무가 많아 상속 포기까지 해야 했다던데. 이제 어디에서 누구와 지내게 될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처음 이사온 날, 앞집 아주머니 아저씨의 초대를 받아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한 아이가 들어오며 인사를 하는데 두 분의 아이라기엔 많이 어려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눈으로 쫓으며 살폈던 것 같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주머니가 먼저 말씀하셨다. 조카인데 사정이 있어서 데리고 있다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계단에서 만나도 언제나 고개를 숙인채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어깨를 움츠리던 아이. 어느날 부턴가 보이지 않는데, 부모님께 간 걸까. 잘 지내고 있을까.
달밭마을에서 소희가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덮은 뒤 남아있는 여운을 가슴에 담아둔 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미르, 소희, 바우가 떠올랐다. 그 아이들의 마음을 미르와 소희와 바우라면 위로해줄 수 있을덴데. 부모를 이해하기 힘든 아이도, 이해할 부모조차 없는 아이도, 늘 움츠린 채로 있던 아이도 미르와 소희와 바우를 만나면 흙바닥에서 엉덩이 툴툴 털고 일어나 걸어나갈 힘을 얻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상처를 이겨낸다.
이 책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르가 엄마와 함께 달밭마을로 이사온 후의 이야기가 1장 미르의 관점, 2장 소희의 관점, 3장 바우의 관점에서 시간순으로 전개되고 4장은 모두의 이야기이다.
세 아이 중 나의 마음을 가장 끌어당긴 것은 소희였다.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던 아이.
소희는 일기장이 두 개였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검사받는 일기장 외에 비밀 일기장이 하나 더 있었고, 그 곳에 소희의 진짜 마음을 써내려갔다. 미르에 대한 첫인상부터 질투심. 자신에게는 없는 것과도 같은 부모님에 대한 생각. 건강이 악화된 할머니에 대한 걱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자신이 혼자 남겨질 것을 더 무서워하는 마음. 그에 따른 죄책감까지.
솔직하면서도 깊은 그 아이의 속이 무척이나 어른스러웠고, 그 점이 안타깝고 애처로워 마음이 갔다.
⌜모범생, 우등생, 부모가 없어도 반듯하게 자란 아이. 철든 아이. 어른스러운 아이....... 소희를 따라다니는 말들이다. 아주 어렸을 때를 빼놓고 소희는 선생님이나 할머니에게 자기 잘못으로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다. 어른들이 어떤 아이를 좋아하는지 알았기에 스스로 그 틀에 맞추어서 살았다.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다 울음을 터뜨리던 미르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소희는 살면서 그래 본 적이 없었다.⌟
_ 너도 하늘말나리야 p.111
이 글이 담긴 장의 소제목은 <울고 싶은 아이> 이다.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희가 주질러 앉아 소리내어 엉엉 울게 해주고 싶었다. 작은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긴 것들 다 쏟아질 때까지.
그러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니, 소희에게 그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아. 무엇보다 소희 스스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용납하지 못할 거야.
미르와 소희는 감정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다. 바우도 그렇다. 바우는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소통과 꽃 그림이라는 매체를 선택했다.
미르는 자기감정을 밖으로 표출해 버리는 반면에 소희는 자기 안에 담아 태워 사그라뜨린다.
소리 내어 우는 행동이 미르의 속을 후련하게 할 수는 있어도 소희의 속에는 오히려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장면 하나를 추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비밀 일기장을 가져본 사람은 안다.
말하고 싶은 것이 글이 되는 것을.
울고 싶은 아이는, 눈물이 글이 되지 않을까.
소희는 자신의 눈물로 빽빽히 비밀 일기장을 채우면서 실컷 글을 흘리고 속이 후련해졌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 나와 닮아 애정이 가는 아이.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후속 작으로 소희의 이야기가 담긴 <소희의 방>이 있다고 한다.
그 아이의 방이 궁금하다.
#개정판 이후 14년 만의 재개정판, 어떻게 다르지?
이 책은 1999년에 발행된 이금이 작가님의 <너도 하늘말나리야>가 20년이 지나 두번째 새 옷을 입고 나온 것이다.
변화한 시대의 감각에 맞게 내용을 고치고 문장도 하나 하나 손 보아 다시 선보인다니, 재개정판과 개정판 이전의 1999년도 작품은 어떻게 쓰였을지 궁금해졌다.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는데 현재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읽어도 무리가 없을 내용인데 어째서 중학교 교과서로 옮겨진 걸까? 어쨌든, 교과서에는 전문이 아닌 일부 문단이 발췌되어 수록되었을텐데 어느 부분이 어떤 식으로 담긴 건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미래엔, 중학교 국어 1-1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니, '마음이의 독서 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안내되어 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은 즐겁게 책만 읽을 거에요." 도서실 국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이 수업 시간에 주인공 마음이가 읽는 책이 바로 <너도 하늘말나리야>였다. 마음이의 독서 일기를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의 흥미와 수준에 맞는 책 선정하기 - 참고 자료를 찾고 메모하며 읽기 - 독서의 즐거움 알기]
라는 책 읽는 법을 익히게 된다.
마음이가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 발췌되어 교과서에 실려있다. '하늘말나리' 꽃에 대해 주인공 바우가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엄마, 이 꽃 이름이 뭔지 아세요? 하늘말나리에요. 진홍빛 하늘말나리는 꽃뿐만 아니라 수레바퀴처럼 빙 둘러 난 잎도 참 예뻐요. 다른 나리꽃 종류들은 꽃은 화려하지만, 땅을 보고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향해 핀대요. 어쩐지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모양 같아요.”
_미래엔, 중학교 국어 1-1에 실린 <너도 하늘말나리야>
응? 수레바퀴라는 표현이 있었나? 싶어 재개정판의 같은 부분을 찾아보았다. 아. 이 부분의 문장이 다듬어져 있었다.
“엄마, 이 꽃 이름이 뭔 줄 아세요? 하늘말나리예요. 진홍빛 하늘말나리는 꽃도 예쁘지만 잎도 예쁘게 났어요. 빙 둘러 난 게 바퀴 모양 같아요. 백합이나 원추리 같은 다른 백합과 꽃들은 꽃이 땅을 내려다보고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향해서 핀대요. 그 모습이 뭔가 소원을 비는 것 같아요.”
_<너도 하늘말나리야> 2021재개정판
아래 문장을 읽으니 꽃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바우가 꽃에 대한 전문적 지식 또한 풍부한 아이라는 것이 더 와닿는다. 아. 이렇게 섬세하게 다듬으셨구나.
인터넷 서점에서 이금이 작가님의 책을 검색해보니 동화부터 청소년소설까지 무려 5페이지에 걸쳐 작품이 나열되는데 개정판이 아닌 책은 최신간 정도이다. 그만큼 작가님의 여러 작품이 오랜 시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책을 내놓는 것 뿐 아니라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그 책의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작가님, 어린이 독자에 대한 작가님의 성의에 따스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