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소설이라고 하더니
꽤 오래만에 보는 작가주의 작품임.
(프랑스가 좋아할 것 같은)
1960년대 소설이고
곤충 채집이 취미인 남자가 해변의 사구(dune) 마을에 갔다가 실종된 이야기다.
읽으면서 꽤 많은 것들이 떠올랐는데,
이끼 (웹툰)
프로메테우스, 시지프스 신화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
신안 염전 노예
동기 = 연결성이 만들어 준다는 것
등이 그렇다.
남자는 사구에 도착한 남자는 마을의 공모로 거대한 모래 구덩이 속 집에 묵게 된다.
그리고 그 집은 말 그대로 노예를 잡아두는 감옥이었음.
어쨌든 물을 얻고 물품을 얻으려면 매일 쌓이는 모래를 치우는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는 구덩이 속 집들이 모래를 치우면서 방어를 해줘야 다른 집들에 피해가 안간다고 하는데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소설 속 설정이니.
그리하여 치우면 쌓이고 치우면 쌓이는 모래를 치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와 함께.
여자는 같이 모래를 치우면서 남자를 닦아주고 먹이기까지 한다 (고된 노동 + a)
제목은 무슨 거미줄을 쳐놓고 남자라는 먹이를 기다리는 요물 여성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 여자는 그냥 무력한 노예일 뿐이다.
마을의 공모, 매일매일 해야 하는 똑같은 노동
온갖 짜증과 분노를 여자한테 풀면서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
그리고 지속적인 시도 끝에 탈출을 하나 했더니 마을 자체가 미로와 같아
결국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다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됨.
여기서부터 이제 셀리그만의 개처럼 현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분노와 절망은 점차 옅어지고 우연히 알게 된 사실로 구덩이 속에서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 열쇠도 찾음.
대부분 수용이 적응과 문제 해결의 시작점이 되듯이
이 소설에서도 수용하는 순간 (새로운) 삶이 탄생한다.
구덩이 속에서의 더 나은 삶 말이다.
결국 적응이라고 하는 것은
수용을 지나 그 조건과 나의 연결성을 만들게 되는 것이고
그 연결성이 생기면 삶의 동기가 된다.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것.
이 소설이 실종 신고서로 끝나지 않고 사망 신고서로 끝나게 된 것은
이전의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에 잘 적응했다는 얘기겠지.
모래와 관련한 묘사가 정말 대단한데
내 감각 경험이 없는 것을 상상해내기란 역시 쉽지가 않다.
작가는 모래가 만든 세상이 이렇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