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책은
원저가 훌륭하다
번역도 훌륭하다
후성유전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기초 개념을 따로 기술해 두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분자생물학이나 유전학에 대한 지식이 좀 있다면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 유전자와 발현, 그리고 후성유전학
처음 유전학에 대해 공부할 때는 정말 뭔소린지 하나도 몰랐고, 관심이 없어서 더 심했다.
너무 생소한 이름들도 그렇지만 뭐가 뭐 어떻게 생기고 돌아간다는 건지
지식들이 하나의 서사로 이어지지 않고 드문드문 확대된 사진같았음.
적극적으로 이해할 마음이 없어서 더 그랬겠지만.
아무튼 모두들? 알다시피 DNA는 모든 세포에 있고 웬만해선 변하지도 않고 세포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세포가 분열할 때는 DNA를 복사한 RNA가 세포 밖으로 나오는데,
필요한 부분만 (예를 들어 간을 만들 위치에 있다면 DNA에서 '간'에 해당하는 정보만) RNA로 복사(전사)되고
리보솜 등에 의해 번역되면 아미노산 사슬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결합하여 굽어지는 형태로 단백질이 된다.
예를 간으로 들었으니 '간'에 해당하는 정보 부분만 보자.
간에 대한 정보를 담은 DNA 서열이 있을 것인데,
이는 사람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는 뜻.
이러한 변이를 SNP(염기 하나)나 SNV(하나 이상
variation)라고 함.
그런데 이렇게 다른 변이는 별차이 없는 표현형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함.
즉, 자신의 고유한 SNV가 타인과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음.
과거 언제까지는 이러한 고유함은 안바뀐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이게 표현형 단계에서 바뀔 수 있도록 유전자 발현이 조절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러한 부분을 연구하는 분야가 '후성유전학'임.
예를 들어, 사람 눈이 핑크색이라는 표현형을 발현시키는 염기서열이 CTAG라고 했을 때,
나는 TTAG를 갖고 있으면 노란색일 수 있다는 의미.
그런데 이 유전자가 RNA로 전사되고 번역되면서 CTAG의 C에 메틸기가 붙으면 발현이 안되거나 과발현될 수 있다.
그렇게 색깔이 달라져 버릴 수 있는데,
이는 DNA가 변한 것도 아니고 단지 표현형이 되는 과정에서 방해물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후성유전학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중 흔한 형태인 메틸화에 해당한다.
# 경험이 중요한 이유
인간은 환경에 대응하고 적응하는 방식으로 발달해 나간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질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같은 환경이라고 해도 대응과 적응, 그보다 앞서 '반응' 자체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유전자에 후성유전의 방식으로 영향을 준다 (이것도 유전이 된다는 것이 밝혀짐)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는 '네덜란드 대기근'과 관련한 쥐 실험이다.
네덜란드 대기근은 2차 대전 막바지(1944년) 흉작과 독일군의 봉쇄로 네덜란드 사람들이 큰 기근을 겪은 사건인데
이때 임산부가 낳은 아기들은 성인이 되어 대사 질환에 걸리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으며 대물림까지 된다는 가설을 낳았다.
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아구티 유전자를 가진 쥐로 실험을 한 결과,
기근을 경험한 쥐들의 아구티 유전자 발현이 대물림되어 나타난 것 (책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즉, 유전자는 그대로지만 기근을 경험한 쥐들의 유전자 일부에 심한 메틸화가 일어났고
이 때문에 적은 음식으로도 비만이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이 유전까지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메틸화라든가 히스톤 변형의 후성 유전은
식이뿐 아니라 기질이라든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영향을 끼친다.
가령, 생애 초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털을 핥아준다든가 하는) 쥐들은
뇌에 메틸화가 심하게 일어나 학습 부진을 겪었으며 질병에도 취약해 진다는 그런 연구 결과들이 많다.
# 엄마를 이해하기 위하여
내 엄마는 불안도가 상당히 높고 신경이 예민하다.
'괜찮다'라고 인식을 해도 신경이 떨리거나, 심박수가 심하게 높아지는 등
자율신경계 반응 자체가 커져서 의식적으로 이완시키는 것이 쉽게 되지 않는 사람이다.
통증에 대한 역치도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병원에서도 일상에서도 삶의 질이 매우 낮다.
부작용은 심하고 회복은 더디며 일상에서도 놀라는 등 에너지 소진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질이나 성향은 자식들에게도 스트레스다.
자신이 에너지가 약하고 불안하니 아이들에게 여유롭고 표용력있게 대할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생각해 보건대,
엄마는 기질 자체가 불안하고 예민한 데다
시골의 가난한 전후세대가 그러하듯이 편안하지 못한 나날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털을 핥아준다거나 하는 생애 초기의 따뜻한 경험이나 교육은 커녕 외할머니의 구박은 학대 수준이었음)
게다가 결혼 이후의 삶도 이런저런 스트레스 자체였으니
아마 온전한 발달을 방해하는 메틸화가 어딘가 수북수북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엄마 뿐은 아니다.
우리나라 국건영 자료를 보면 모든 연령대에서 여성들의 불안과 스트레스가 남성보다 높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경험으로 인한 메틸화도 높을 텐데,
이들의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메틸화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와 불안이 기본적으로 높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게 자연스럽긴 할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내 환경과 조건에 대한 스트레스 또한 컸음에도 불구하고
후성유전학을 통해 바라보면 원망보다는 이해를 얻게 된다.
왜 엄마가 그렇게 불안하고 예민하게 모두의 삶을 불편하게 하는지 이해가 좀 가긴 하는 것이다.
다 그 자신의 기질이 약한데다 삶도 불행해서 그런 탓이지.
물론 당연히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불행을 뛰어 넘어 불안해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나름 훌륭하고 건실하고 생산적으로 자기를 이끌어낸 사람도 있을테고.
아무튼 뭐 하나만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
불변의 유전에 변화를 준다는 후성유전학의 이러한 매력 때문에 (물론 메틸화 자체도 상당히 안정적이어서 변화가 어려움)
인지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발달이라든가 생물학의 영역 자체가 이미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유전자 수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일단 놀랍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생애 초기 경험이나 태중 경험이 중요한 만큼 사회를 좀 더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가 도출되는 한편,
유전자에 의해 모든게 결정된 후가 아니라
내가 바꾸고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여전히 있다는 점이 희망적이기도 하고.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꼭 유전자를 헤쳐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잖아.
다만 같은 조건에서도 '어떻게 반응하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사람의 기질과 함께 '태도'도 그 사람을 만들어 가는 근간이지.
사회는 사회대로 조건의 수준을 좋게 만들어 나가야겠지만
개인 역시 개인 차원에서 좋은 태도와 인식을 길러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보다 힘들었던 환경에서 버티고 살아낸 사람에게 측은지심과 배려심을 가져야겠지.
인간으로 잘 발달해 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게야.
덧.
얼마전 일루미나 코리아에서 프로모션을 나왔길래 에피젠 장비는 얼마나 하는지 물어보았다.
키트 제외하고 장비 초기 세팅만 5억이라고 함.
아 네....
... 그렇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