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아침마다 크게 틀어놓으셨던 '손석희의 시선집중', 한 번도 자의로 들어본 적 없는 방송이었건만 마지막 방송을 하며 먹먹해하던 그의 목소리를 듣고 괜시리 찡했었다. 프로그램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게 가슴으로 느껴졌고 차가운 줄만 알았던 손석희 아나운서의 따뜻함이 느껴졌달까?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손석희 아나운서의 매력은 냉철한 진행이 아니던가? '100분 토론'에서 마구 흥분해가는 패널들을 향해 한 마디 툭 던지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그가 말하는 법을 연구한 책이라니 시선이 확 집중!!
1. 손석희가 말하는 법
손석희의 말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이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이유, 그가 논쟁에서 이겼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것을 논리적 커뮤니케이션의 전문가인 저자가 실제 손석희 아나운서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씩 설명해주니 무릎을 탁 치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손석희의 화법은 다르다. 논리적으로 상대방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상대방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는 다시 논리의 한 발을 내딛는다. 상대방은 한 발 더 뒤로 물러난다. 상대방이 벼랑 끝에 섰을 때, 그는 논리의 칼을 거두고 물러선다. 상대방은 그제야 자신이 선 자리를 돌아보고 이미 자신이 벼랑 끝까지 밀렸음을 깨닫게 된다. 보고 있는 사람들은 누가 승자고 패자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부경복, '손석희가 말하는 법' -107쪽
논리로 상대방을 몰아가다가 내가 이겼음을 말로 확인받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고수는 마지막 순간에 칼을 거둘 줄 안다. 그러면 오히려 상대는 더 무력함에 빠지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끝까지 내 논리를 주장하고 나서 어때? 대단하지? 하고 과시하는 듯한 말하기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말하기다. 밀어부치다 결정적인 순간에 여유로운 뒷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했는데.
바르도는 다른 나라 사람의 일부 성향을 과장해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희화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희화화에 대해 당연하다는 판단을 부여했다. / 손석희는 바로 이 순간에 그 단어를 낚아챈다. 희화화라는 단어에 상대방이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 판단이 명확해졌을 때, 그 단어를 그런 의미로 사용한다. 이제 상대방은 "제가 말한 희화화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라거나 "그러한 희화화는 문제가 있다"라고 피해갈 수 없다. 이처럼 손석희는 일정한 면적 안에서 떠도는 언어의 의미가 상대방의 말에 의해서 어느 지점에 멈춰 서는 순간, 그 단어를 정확하게 집어내 상대방이 한 말의 합리성을 검증한다. 각자 나름의 의미로 단어를 해석하던 청취자들은 그가 비추는 논리의 조명을 보고, 상대방의 말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다.
▼ 부경복, '손석희가 말하는 법' -124~125쪽
이 책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손석희가 시선집중에서 브리짓 바르도와 했던 대담의 내용을 분석하며 글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소개한 부분은 바르도가 개고기를 계속해서 먹는다면 희화화를 당해도 싸다는 식의 말을 했을 때, 손석희가 반박을 했던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방금 했던 말을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말에 허점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이건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사이에 자주 쓰던 방법이었는데 다만 나는 먼저 흥분해버리기 때문에 싸움처럼 보일 위험이 ㅋㅋㅋ
2. 손석희의 신념
이 책에서 말 잘하는 여러 사람 중에 손석희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신념을 바탕에 둔 말하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무능한 지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고 그들은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오늘의 아픔은 절절히 느끼지 못한다(195쪽). 과거는 과거일 뿐 묻어두자고 왜 그리 부정적이냐 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손석희의 말을 보면 그는 오늘의 아픔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철저히 오늘을 말하며 미래를 생각한다. 어제 썰전 재방송을 보니 강용석이 박원순 서울 시장을 비판하며 시장될 감이 아닌 사람이 시장을 하고 있다고 디스를 해댔다. 자잘한 일들은 공무원들에게나 맡기고 시장이면 큼직큼직한 일을 해내란다. 돌고래 방생하고 양봉하는 서울 시장은 우습다는 식이었다. 난 강용석을 보며 이 책을 떠올렸다. 오늘 하루 서울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의 마음 속은 들여다 보려 하지 않으면서 더 큰 것만 보라고 미래만 보라고 종용하는 느낌을 받았다. 강용석이 말하는 미래는 과연 현재의 아픔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손석희는 강한 자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여 서민들에게 통쾌함도 선사하는 언론인이었다. 사회적으로 힘 있는 자들에게 더 논리적인 합리성을 요구한다. 이성과 합리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주의에 지도층은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민주주의에서 누가 누군가를 지도하는 게 말이나 되냐는 이야기다. 그는 이러한 신념 위에 서 있기에 그렇다고 우리가 믿기에 지금까지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손석희 아나운서, 아니 JTBC 보도부문 사장의 최근 행보에 사실 놀라기도 하고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시선집중의 날카로운 저격수 느낌을 간직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더욱 그랬을 터다. 그런 그가 이제 다시 뉴스 앵커로 돌아온다고 한다. 시선집중 작가팀도 이끌고 나타난다고 한다. 비록 종편에서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꼭 한 번 보고싶다.
작품은 기술이 만들지만 걸작은 철학이 만든다.(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