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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러
  • 헌법의 풍경
  • 김두식
  • 12,600원 (10%700)
  • 2011-12-20
  • : 4,330
`나의 종교를 인정받는 방법`이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이야기. 비단 종교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구절.
따지고 보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그리 쉽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신론도 일종의 신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국에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지켜주는 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자기 사상의 자유를 지키려는 공산주의자라면 기독교인들의 종교를 지켜주는 데 남보다 더 열심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음란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예를 들어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출판되었다고 칩시다. 기독교인들은 그 작품에 대해 청소년의 영혼을 좀먹는 쓰레기 같은 책이라며 구입 거부 운동을 벌일 수 있습니다. 서점 앞에서 "기독교인이라면 <즐거운 사라> 같은 쓰레기를 파는 이런 서점에서 절대로 책을 구입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보이콧을 선동하는 시위를 벌여도 좋습니다. 이것도 역시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이 <즐거운 사라>의 저자 마광수를 붙잡아가려고 할 때에는, 마광수와 어깨를 겯고 함께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기독교 서적이 청소년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명분으로 판매 금지되고 저자가 붙잡혀간다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는 반드시 필요한 태도입니다.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일종의 형제 관계이듯, 그 우산 아래 보호를 받는 우리 `이상한 사람들`도 헌법 아래에서는 일종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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