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은 다르다. 세상이 고해라 할 때 우리는 보통 고통을 떠올린다. 그러나 불교에서 고해라 할 때 ‘고’는 고통이 아니라 괴로움을 말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고통에 저항하면 더 나빠질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긴장을 풀고 호흡을 하면서 소리내는 것을 참지 않았고 내몸이 지능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여느 동물처럼 생각을 하지 않고 몰두하면서 내게 펼쳐지는 드라마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고통을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뭔가가 바뀌었다. 아기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고통의 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더 이상 호흡으로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엄청난 고통은 뭔가가 잘못되어간다는 의미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자신감은 사라졌고 긴장 없이 고통의 파도를 맞겠다는 결심은 잊혀졌다. 강렬한 출산의 순간에 나는 고통과 대립하며 완전히 교전 중이었다. 두려움과 저항으로 고통에 반응하는 것을 많이 봐온 산파는 즉각 나를 안심시켰다. ‘잘못된 건 없어요,… 모든 게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단지 고통스러울 뿐이에요.’ 그녀는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번 말을 반복했고 타는 듯한 고통, 폭발할 것 같은 압력, 찢김과 탈진 중에 나는 다시 깊게 호흡하고 긴장을 푸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고통일 뿐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열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붓다는 생노병사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고통을 고, dukka라 한 것이 아니다. 팔리어 dukka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고통이 아니라 뭔가 어긋났다는 말이다. “붓다는 우리가 경험에 연연해하거나 저항할 때,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할 때 괴롭다고 가르쳤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저자는 무엇이 고통을 괴로움으로 바꾸는지 묻는다. 붓다의 답은 무아(無我)였다.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타인이나 인생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나타난다. 무가치감과 소외감은 여러 형태의 고통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우리가 지루하거나 어리석고 이기적이거나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무가치감의 트랜스는 삶이 고통스럽고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껴질 때 더 강하다.”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은 세계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이다. 붓다는 분리되었다는 그 느낌, 나(我)라는 느낌이 문제의 근원이라 말한다.
“우리는 가족이나 학교 친구 혹은 직장 동료 같은 소속 집단이 모두 우리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배운다. 성공하라고 똑똑하고 매력있고 능력있고 힘있고 돈이 많아 남보다 뛰너나 보이라고 압력을 받으며 서로 경쟁한다.” 우리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 증명의 이유를 기독교에선 ‘원죄’라 부른다. “원죄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본성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생이 편안할 자격도 없다. 우리는 쫓겨난 사람들이고 만약 동산에 다시 들어가길 원한다면 원죄를 지고 태어난 자기를 구원해야 한다. 우리의 부모와 문화는 우리에게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는 가르침을 통해 에덴 동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내면화할 때 우리는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빠진다.”
자신이 어긋났다는 근본적인 느낌, 그것을 붓다는 고(苦)라 불렀다. 근본적인 불안감,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끊임없이 자기개선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우리는 완벽한 몸과 용모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준을 만족시키려 흰머리를 염색하고 주름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직장에서는 더 좋은 직위를 얻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인다. 훈련하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명상을 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워크샵에 참가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맘 편히 즐기기보다 우리 자신을 이상적인 모습과 비교하며 그 차이를 줄이려 애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물러선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스토리를 지어내 끊임없이 자신에게 전하는 식으로 두려움과 수치심의 생생한 느낌에서 벗어나려 한다. 우리는 막연한 불안 상태로 살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재난 시나리오가 흘러다닌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실패에 단단히 대비하는 태도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다를 떨면서 존재의 불안감을 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전략은 불안감을 없애기는커녕 강화할 뿐이다.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괴로움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붓다는 “모든 고통이나 불만족은 우리를 분리된 개별 존재로 보는 잘못된 이해” 때문이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기’는 익숙한 생각, 정서, 행동 패턴의 집합이다. 마음은 이것들을 한데 묶어 시간이 가도 연속성을 갖는 한 독립된 개인의 사적인 스토리를 만든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나의’ 스토리에 포함되고 ‘나의’ 경험이 된다. ‘내’가 두려운 것이고 ‘내’가 욕망하는 것이다.아잔 붓다다사는 경험에 ‘자기’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습관을 ‘나-내세우기(I-ing)’와 ‘나의-내세우기(my-ing)’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어떤 식으로건 자기에 속하거나 자기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의 주어를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명상하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 흔히 경헙되는 것은 흥분, 불한, 초조, 분노 같은 감정의 파도와 끊임없는 지적과 판단, 과거 기억과 미래의 스토리 들 걱정과 계획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붓다는 지속적인 정서적, 정신적 자동반응을 ‘폭포’가 불렀다. 그 이유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 우리가 너무 쉽게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휩쓸려 가버리기 때문이다. 사람, 상황, 마음 속 생각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제로는 몸에서 일어난 감각들에 대한 반응이다. 누군가의 무능함을 참지 못하고 비난을 할 때 사실은 우리 자신의 불쾌한 감각들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마음이 끌려 열망과 환상으로 가득할 때 사실은 유쾌한 감각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동반응적인 생각, 정서, 행동의 소용돌이는 이와 같이 감각에 대한 자동반응으로부터ㅓ 나타난다. 이들 감각이 인식되지 않으면 우리 삶은 자동반응의 폭포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는 생생한 깨어있음으로부터 온전한 의식으로부터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감정의 주인이 없다는 것, 그것들은 그저 일어나는 상(相)일 뿐이라는 것, 그 상들의 주인은 없다는 것 내가 ‘나’라 부르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괴로움을 다루는 첫걸음이다.
“느낌이 생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것들이 그냥 제멋대로 오고 간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감각은 난데없이 나타났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아는 인지알 수 없었다. 진동, 박동, 따끔거림을 느끼는 ‘나’는 없었다. 불쾌한 감각에 짓눌린 ‘나’가 없었다. 생각을 만들어내거나 명상하려고 노력하는 ‘나’가 없었다. 삶은 단지 일어나고 있었고 현상들이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일 때,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무가치함이란 원죄는, 세계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벗어버릴 수 있다.
“모든 지나가는 경험을 ‘이 또한 마찬가지’의 개방성으로 수용하자, 몸과 마음 안의 어떠한 경계나 경계나 견고함의 느낌도 사라졋다.” 내 안의 생각과 느낌도 나 밖의 세계의 상(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 정서, 생각은 날씨처럼 의식의 하늘에서 그저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뉴잉글랜드 가을의 아름다움에 감격했다. 나무들은 지면에서 높이 솟아 있었고 노할고 빨간 나뭇잎들은 선명한 푸른 하늘과 대비되었다. 색깔들은 내 몸을 통해 전개되는 생생하고 감각적인 삶의 일부로 느껴졌다. 바람 소리는 나타났다 사라졌고 나뭇잎은 땅으로 춤추듯 떨어졌으며 새는 가까운 나뭇가지에서 날아올랐다. 전체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안의 삶처럼, 어떤 것도 고정되지도 견고하지도 막혀있지도 않았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세상의 일부임을 알았다. 그 다음 복부 경련을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지 자연 세계의 또 다른 일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가 지나가는 통증과 압력이 땅의 단단함, 떨어지는 낙엽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는 그저 고통이 있었고 그것은 땅의 고통이었다.”
저자는 우리의 근원적 불안감, 원죄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라 말한다. 그저 불안감이란 느낌이 거기에있다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승찬 스님은 참된 자유란 ‘불완전함에 대해 근심이 없는’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는 인간의 존재와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불완전함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욕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며 병이 들고 약해진다. 불완전함을 편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달라지려고 하거나 잘못된 것을 두려워는 데 빠져 우리 삶의 순간들을 잃어비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리가 그 순간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스토리들을 내려놓고 고통이나 욕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을 때 근본적 수용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진정한 수용의 두 날개는 명확히 보기와 우리의 경험을 자비로 감싸 안기이다. 명확히 보기의 날개는 흔히 불교 수행에서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 기술된다. 이것은 순간순간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의식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마음챙김할 때 질주하는 생각과 긴장되어 떨이는 몸과 도망가고 싶다는 욕구를 의식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려 하거나 없애버리려 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을 의식한다. 두번째 날개인 자비는 우리가 지각한 것과 부드럽고 호의적인 방식으로 관계하는 능력이다. 두려움이나 슬픔의 감정에 저항하는 대신 아이를 보듬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을 감싸 안는다. 주의를 끌려는 욕구 혹은 초콜릿이나 섹스에 대한 욕구를 비난하거나 멋대로 충족하기도바 부드러움과 배려로 감싼다. 자비는 우리의 수용을 번면적이고 완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