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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 12,420원 (10%690)
  • 201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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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뭐라 건 네 갈 길을 가라’ 맑스는 신곡에 나오는 이 말을 평생의 자우명으로 삼앗다. 듣기엔 멋진 말이다. 실제 맑스는 그 말대로 살았다. 그러나 그 말에 따라 사는 사람도 멋질까? 저자가 그리는 맑스란 사람은 존경할 수는 있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기 힘들다.

 

“그가 호의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배려해줬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대다수를 바보 아니면 아첨꾼으로 보았으며 그들을 드러내놓고 의심하거나 경멸햇다. 그가 외부인들에게 보인 태도는 지나치게 고압적이어서 불쾌감까지 주었다.” 천재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천재들은 자신이 본 것을 보지 못하는 개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바보는 벌레일 뿐이다. 케인즈 역시 그러했는데 면전에 대고 경멸하고 모욕을 주기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케인즈에게 바보 취급을 받고 모욕을 당한 어느 경제학 교수는 얼마나 분했는지 아무 말 없이 케인즈를 보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런 천재들의 우주는 자신이 인정할 수 잇는 작은 소집단에 만들어진다. 케인즈의 우주는 엘리트 집담인 케임브리지 대의 사도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였다. 맑스의 우주 역시 그 만큼 아니 더 작았다. “그는 주위 환경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살았다. 그의 주변에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 정치적 동지들로 구성된 소집단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주로 독일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그는 (런던에 살 때도) 영국인이라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에 대해 이해라려고도 신경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별나리만치 주위 환경에 영량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우주를 벗어난 곳은 외계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맑스는 당대의 혁명가들 중에서 기묘하게도 고립된 채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고립은 단순히 기질” 때문은 아니었다. 남이야 뭐라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남’을 침묵하게 하는 거대한 신념이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비교하면서 두 작품은 오직 그 때만 가능했다고 말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주관과 객관, 다시 말해 개인과 세계의 균형이라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러한 균형이 완전하게 구현된 것이 두 작품의 위대성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균형은 오직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보여준 비전에서만 가능했다.

 

“헤겔이 청년기에 프랑스혁명 때문에 열광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헤겔, 훨더린, 쉘링 등 젊은 날의 친구들이 튀빙엔의 학창시절에 자유의 나무를 심고 혁명가를 부르며 그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또 학창시절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금지된 저술들을 읽는 것에 몰두하는 어떤 비밀 클럽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러한 열광은 그 당시 독일 지식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의 프랑스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열광의 분위기에 속하는 것이다. 헤겔의 특별한 위치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이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에 집착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 혁명 속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를 탐지했다는 점에 있다.” (루카치 ‘청년헤겔 I’)

 

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의 입장은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위기 이후에 나폴레옹 체제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생성되는 중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이제 그것의 사상적 표현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헤겔이 지금 자신의 고유한 철학 체계에 대해 내리는 독특한 평가는 그의 철학이 새로운 세계사적 시대의 시초를 철학적으로 총괄한다는 생각이다.” (루카치 ‘청년헤겔 II’) 그러므로 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은 자신이 종교개혁 이래 이성과 현실의 화해가 마침내 실현되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헤겔이 본 것은 개인(멜로디 악기)의 자유 그 그리고 그 자유가 구현되는 사회(나머지 악기들)가 화음을 이루어 웅장한 음악을 울릴 수 있다는 비전, 프랑스 혁명이 보여준 것은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현상학이 쓰여지고 영웅 교향곡이 쓰여진 바로 그 때부터 불가능해졌다. 헤겔이 심은 자유의 나무는 말라죽을 운명이엇다.

 

맑스의 세대가 본 것은 “적대적이고 천박한 세계”였다. 그러나 윗 세대의 비전을 물려받은 맑스는 “현재의 비이성적이고 혼란한 세계는 필연적으로 파멸할 것이라 믿엇다. 그 결과로 질서정연하고 잘 통제되는 자율적인 사회(정신현상학과 영웅 교향곡이 그린 세계)가 도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잇었다. 그것은 모든 문제들을 종결짓고 모든 어려움을 녹여 버리는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었다. 다시 말해 16,17세기 사람들이 처음에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에서 그 후에는 과학의 진리와 프랑스 대혁명의 원리 및 독일 형이상학자들의 체계들에서 찾아낸 것과 유사한 해방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었다. 이들 초창기 합리주의자들을 광적이라 부를 수 잇다면 같은 의미에서 맑스 또한 광적이엇다.”

 

맑스를 선배들과 구분하는 것은 그의 종합에 있었다. “맑스 이론의 독창성은 지금까지 종종 의심을 받고는 했다 그러ㅏ 그의 이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독창적이다. 맑스 이론을 독창적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의 견해를 수정하고 결합함으로써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형식화도 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한 과학적 이론을 일컬어 말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다. 맑스가 추구한 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진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저서에서 진리를 발겨하면 그는 자신이 새로 종합한 이론 속에 그것을 결합하려 애썼다. 그의 사상의 기본 방향이 모습을 갖춘 파리 시절에는 특히 그랫다. 결과에서 독창적인 것은 어느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고 중심가설이앋. 중심가설이 각 구성요소를 나머지 모든 구성요소들과 걸합시킴으로써 부분들은 단일한 체계의 전체 안에서 전제와 결론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 잘 알려진 경험적 용어를 사용하여 명료하면서도 통일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에서 자연스럽게 명확한 실천적 지침들을 이끌어 냇다. 이것이 그의 이론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엿다” 맑스의 종합은 헤겔에서 시작된다.

 

“헤겔 철학이 뿌리내릴 만한 토양은 고전주의 시대의 믿음과 어법에 대한 반발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시작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은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확고한 흐름이 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어법은 계몽주의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어법은 뉴튼 역학이었다. “과학분야의 성과들은 자연스럽게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삶을 이끌어가는 데 적용되었다.” 문제는 이 어법이 역사를 고려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연의 많은 시스템들은 균형점을 갖고 있다. 당신이 지금 표면이 매끄럽고 둥글며 밑바닥이 원형인 큰 유리그릇과 고무공을 가지고 잇다 하자. 그릇의 가장자리에다 공을 놓고 손을 떼면 한동안 공은 앞뒤로 움직이면서 빙빙 굴러다니다 결국 그릇 밑바닥에 멈춘다. 그 순간 공은 균형 상태에 놓인다.” (바인하커) 문제는 균형 시스템에선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릇 안에서 공이 굴러다니는 것을 비디오로 찍었다 하자. 그 비디오를 리버스로 재생해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컵이 깨진다든가 씨앗에서 싹이 튼다든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역사가 매우 중요하다” 역사가 있는 것은 가역적이지 않다. 뉴튼 역학의 어법으로는 비가역성을, 역사를 설명할 수없다.

 

자연과학, 정확히는 뉴튼역학의 어법을 인간세계에 적용하려는 것은 헤겔에게 “과학적 독단주의의 구현으로 보였다. 볼테르나 흄이 이해한대로 역사를 과학적 규칙들에 따라 기술한다면 역사적 사실들은 엄청난 왜곡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단 하나의 참된 정의는 그 사물의 개벌적 역사에서 볼 때 왜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물질적 조건은 1세기나 8세기, 15세기에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후대의 이탈리아인들과는 대단히 달랐고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인들은 당시 쇠퇴 일로에 있던 이탈리아가 잃어버힌 특징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과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이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조건들은 역사적 변화, 진보와 반동, 영광과 쇠퇴으 원인이 될 수 없다. 각 시대는 이전 시대로부터 새로운 무엇인가를 물려받는다. 발전의 원리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론의 토대인 규칙적인 반복의 원리를 배제한다.”

 

헤겔은 역사의 역학을 구성하기 위해 의인화를 시도했다. “헤겔은 개인의 인격적 특성을 가리키는 개념 즉 사고와 선택의 목적, 논리, 성질 등을 모든 문화와 민족에다 옮겨놓았다. 헤겔은 그것을 이념 혹은 정신 등 여러가지로 불렀으며 특정한 민족들과 문명들의 발전과정 즉 의식을 갖는 전체로서의 우주의 발전과정의 동기이자 동적 요소라 말했다.”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우리는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든 행위를 하나의 연속적인 합목적적 활동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의 생애의 여러 단계에서 끌어온 수많은 자료의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자료가 모여 그에 관한 우리으 정신적 초상을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라든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관한 우리의 개념도 마찬가지라 보았다.”

 

헤겔은 역사를 그린다는 것은 “운동 중인 시대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라 보았다. 그 초상화, 즉 정신, 이념은 헤르더의 집단정신이란 모호한 개념에서 발전한 것이다. “특수한 것, 구체적인 것, 분화된 것, 개별적인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의 가장 생생한 표현을 찾으라는 이러한 명령, 즉 역사를 사진가나 통계학자의 눈으로 보지 말고 전기 작가나 화가, 그리고 리얼리즘의 눈으로 보라는 이러한 명령은 독일 역사주의의 독특한 유산이다. 이 학설은 오늘날에는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한 세대 전체에는 이 학설이 기존 생각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인 동시에 그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민족이나 시대의 전형으로 보곤한다. 우리는 또한 특정 시대나 민족 혹은 심지어 행위를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 독일 낭만주의, 빅토리아 시대 등의 정신의 표현으로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널리 존재하는 사회적 태도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적극적인 인과적 속성의 인격을 부여하는 습관이 잇는데 이러한 습관은 바로 이 새로운 역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라는 말을 재정립한 헤겔은 당대의 신조가 되엇고 인문학의 언어를 정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말하는 그 정신이 무엇이냐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는 그 시기의 모든 현상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정신이 그 내부에서 활동함으로써 결정된다고 단언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문화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역사는 정신의 역사라 한 것에 있다. 포이어바흐는 모호한 신비주의일 뿐이라 공격한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이념이라는 것이 이념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의 동어반복적 재구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기독교의 인격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달리 “역사의 원동력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의 총합이라고 선언한다.” “여전히 관념론자였던 맑스는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독단주의에서 깨어났다.”

 

이후 파리에서 맑스는 헤겔주의와 프랑스의 사회이론들,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종합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맑스는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이론, 즉 인류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형식적 관계들에 관한 이론은 헤겔에세서 이끌어냈지만 요소 자체에 관한 내용은 생시몽과” 같은 프랑스인들에게서 얻었다.

 

예를 뜰어 생시몽은 “경제적 관계의 발전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엇다.” 그리고 푸리에와 시스몽디는 “이전으 모든 계급투쟁은 재화의 부족으로 발생했지만 앞ㅇ로의 계급투쟁은 기계적 생산수단의 발달과 그에 따른 풍요한 재화의 생산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계급투쟁을 막을 수 잇는 것은 “국가의 개입 뿐이다. 국가는 자본을 축적할 권리와 생산수단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스몽디는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그러한 정책을 주창한 인물이엇으며 복지국가를 예언한 선구자였다.” 맑스는 경제적 관계의 우위와 분배의 문제라는 두가지를 모두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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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균형이라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러한 균형이 완전하게 구현된 것이 두 작품의 위대성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균형은 오직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보여준 비전에서만 가능했다.   “헤겔이 청년기에 프랑스혁명 때문에 열광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헤겔, 훨더린, 쉘링 등 젊은 날의 친구들이 튀빙엔의 학창시절에 자유의 나무를 심고 혁명가를 부르며 그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또 학창시절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금지된 저술들을 읽는 것에 몰두하는 어떤 비밀 클럽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러한 열광은 그 당시 독일 지식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의 프랑스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열광의 분위기에 속하는 것이다. 헤겔의 특별한 위치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이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에 집착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 혁명 속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를 탐지했다는 점에 있다.” (루카치 ‘청년헤겔 I’)   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의 입장은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위기 이후에 나폴레옹 체제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생성되는 중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이제 그것의 사상적 표현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헤겔이 지금 자신의 고유한 철학 체계에 대해 내리는 독특한 평가는 그의 철학이 새로운 세계사적 시대의 시초를 철학적으로 총괄한다는 생각이다.” (루카치 ‘청년헤겔 II’) 그러므로 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은 자신이 종교개혁 이래 이성과 현실의 화해가 마침내 실현되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헤겔이 본 것은 개인(멜로디 악기)의 자유 그 그리고 그 자유가 구현되는 사회(나머지 악기들)가 화음을 이루어 웅장한 음악을 울릴 수 있다는 비전, 프랑스 혁명이 보여준 것은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현상학이 쓰여지고 영웅 교향곡이 쓰여진 바로 그 때부터 불가능해졌다. 헤겔이 심은 자유의 나무는 말라죽을 운명이엇다.   맑스의 세대가 본 것은 “적대적이고 천박한 세계”였다. 그러나 윗 세대의 비전을 물려받은 맑스는 “현재의 비이성적이고 혼란한 세계는 필연적으로 파멸할 것이라 믿엇다. 그 결과로 질서정연하고 잘 통제되는 자율적인 사회(정신현상학과 영웅 교향곡이 그린 세계)가 도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잇었다. 그것은 모든 문제들을 종결짓고 모든 어려움을 녹여 버리는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었다. 다시 말해 16,17세기 사람들이 처음에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에서 그 후에는 과학의 진리와 프랑스 대혁명의 원리 및 독일 형이상학자들의 체계들에서 찾아낸 것과 유사한 해방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었다. 이들 초창기 합리주의자들을 광적이라 부를 수 잇다면 같은 의미에서 맑스 또한 광적이엇다.”   맑스를 선배들과 구분하는 것은 그의 종합에 있었다. “맑스 이론의 독창성은 지금까지 종종 의심을 받고는 했다 그러ㅏ 그의 이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독창적이다. 맑스 이론을 독창적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의 견해를 수정하고 결합함으로써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형식화도 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한 과학적 이론을 일컬어 말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다. 맑스가 추구한 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진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저서에서 진리를 발겨하면 그는 자신이 새로 종합한 이론 속에 그것을 결합하려 애썼다. 그의 사상의 기본 방향이 모습을 갖춘 파리 시절에는 특히 그랫다. 결과에서 독창적인 것은 어느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고 중심가설이앋. 중심가설이 각 구성요소를 나머지 모든 구성요소들과 걸합시킴으로써 부분들은 단일한 체계의 전체 안에서 전제와 결론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 잘 알려진 경험적 용어를 사용하여 명료하면서도 통일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에서 자연스럽게 명확한 실천적 지침들을 이끌어 냇다. 이것이 그의 이론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엿다” 맑스의 종합은 헤겔에서 시작된다.   “헤겔 철학이 뿌리내릴 만한 토양은 고전주의 시대의 믿음과 어법에 대한 반발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시작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은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확고한 흐름이 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어법은 계몽주의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어법은 뉴튼 역학이었다. “과학분야의 성과들은 자연스럽게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삶을 이끌어가는 데 적용되었다.” 문제는 이 어법이 역사를 고려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연의 많은 시스템들은 균형점을 갖고 있다. 당신이 지금 표면이 매끄럽고 둥글며 밑바닥이 원형인 큰 유리그릇과 고무공을 가지고 잇다 하자. 그릇의 가장자리에다 공을 놓고 손을 떼면 한동안 공은 앞뒤로 움직이면서 빙빙 굴러다니다 결국 그릇 밑바닥에 멈춘다. 그 순간 공은 균형 상태에 놓인다.” (바인하커) 문제는 균형 시스템에선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릇 안에서 공이 굴러다니는 것을 비디오로 찍었다 하자. 그 비디오를 리버스로 재생해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컵이 깨진다든가 씨앗에서 싹이 튼다든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역사가 매우 중요하다” 역사가 있는 것은 가역적이지 않다. 뉴튼 역학의 어법으로는 비가역성을, 역사를 설명할 수없다.   자연과학, 정확히는 뉴튼역학의 어법을 인간세계에 적용하려는 것은 헤겔에게 “과학적 독단주의의 구현으로 보였다. 볼테르나 흄이 이해한대로 역사를 과학적 규칙들에 따라 기술한다면 역사적 사실들은 엄청난 왜곡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단 하나의 참된 정의는 그 사물의 개벌적 역사에서 볼 때 왜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물질적 조건은 1세기나 8세기, 15세기에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후대의 이탈리아인들과는 대단히 달랐고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인들은 당시 쇠퇴 일로에 있던 이탈리아가 잃어버힌 특징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과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이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조건들은 역사적 변화, 진보와 반동, 영광과 쇠퇴으 원인이 될 수 없다. 각 시대는 이전 시대로부터 새로운 무엇인가를 물려받는다. 발전의 원리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론의 토대인 규칙적인 반복의 원리를 배제한다.”   헤겔은 역사의 역학을 구성하기 위해 의인화를 시도했다. “헤겔은 개인의 인격적 특성을 가리키는 개념 즉 사고와 선택의 목적, 논리, 성질 등을 모든 문화와 민족에다 옮겨놓았다. 헤겔은 그것을 이념 혹은 정신 등 여러가지로 불렀으며 특정한 민족들과 문명들의 발전과정 즉 의식을 갖는 전체로서의 우주의 발전과정의 동기이자 동적 요소라 말했다.”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우리는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든 행위를 하나의 연속적인 합목적적 활동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의 생애의 여러 단계에서 끌어온 수많은 자료의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자료가 모여 그에 관한 우리으 정신적 초상을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라든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관한 우리의 개념도 마찬가지라 보았다.”   헤겔은 역사를 그린다는 것은 “운동 중인 시대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라 보았다. 그 초상화, 즉 정신, 이념은 헤르더의 집단정신이란 모호한 개념에서 발전한 것이다. “특수한 것, 구체적인 것, 분화된 것, 개별적인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의 가장 생생한 표현을 찾으라는 이러한 명령, 즉 역사를 사진가나 통계학자의 눈으로 보지 말고 전기 작가나 화가, 그리고 리얼리즘의 눈으로 보라는 이러한 명령은 독일 역사주의의 독특한 유산이다. 이 학설은 오늘날에는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한 세대 전체에는 이 학설이 기존 생각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인 동시에 그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민족이나 시대의 전형으로 보곤한다. 우리는 또한 특정 시대나 민족 혹은 심지어 행위를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 독일 낭만주의, 빅토리아 시대 등의 정신의 표현으로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널리 존재하는 사회적 태도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적극적인 인과적 속성의 인격을 부여하는 습관이 잇는데 이러한 습관은 바로 이 새로운 역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라는 말을 재정립한 헤겔은 당대의 신조가 되엇고 인문학의 언어를 정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말하는 그 정신이 무엇이냐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는 그 시기의 모든 현상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정신이 그 내부에서 활동함으로써 결정된다고 단언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문화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역사는 정신의 역사라 한 것에 있다. 포이어바흐는 모호한 신비주의일 뿐이라 공격한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이념이라는 것이 이념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의 동어반복적 재구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기독교의 인격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달리 “역사의 원동력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의 총합이라고 선언한다.” “여전히 관념론자였던 맑스는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독단주의에서 깨어났다.”   이후 파리에서 맑스는 헤겔주의와 프랑스의 사회이론들,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종합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맑스는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이론, 즉 인류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형식적 관계들에 관한 이론은 헤겔에세서 이끌어냈지만 요소 자체에 관한 내용은 생시몽과” 같은 프랑스인들에게서 얻었다.   예를 뜰어 생시몽은 “경제적 관계의 발전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엇다.” 그리고 푸리에와 시스몽디는 “이전으 모든 계급투쟁은 재화의 부족으로 발생했지만 앞ㅇ로의 계급투쟁은 기계적 생산수단의 발달과 그에 따른 풍요한 재화의 생산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계급투쟁을 막을 수 잇는 것은 “국가의 개입 뿐이다. 국가는 자본을 축적할 권리와 생산수단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스몽디는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그러한 정책을 주창한 인물이엇으며 복지국가를 예언한 선구자였다.” 맑스는 경제적 관계의 우위와 분배의 문제라는 두가지를 모두 받아들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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