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브로델의 경력은 이 질문과 함께 시작했다. 아날 학파 이전까지 역사학의 대상은 사건들이었다. 브로델은 “정치와 외교를 비롯한 사건 중심의 역사를 고집하던 기성 ‘소르본학파’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그의 휘하에 “젊은 역사학도들이 모여들어 아날학파 2세대를 형성’했다. 브로델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 즉 “장기지속을 역사학뿐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 방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로델은 “역사를 ‘시간지속의 변증법’이라 표현”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이 둘 사이에는 활발하고 밀접한 대립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대립이야말로 사회적 실재의 핵심에 존재하며 다른 어느 요소보다도 중요하다. 우리의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를 움직이는 갖가지 힘과 조류, 움직임의 계층적 질서를 정의;해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합쳐서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연구하는 각 순간마다 오래 이어지는 움직임과 짧은 움직임을 구분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역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생기면 오랜 시간 관성을 얻은 힘과 새로 등장한 힘 사이에 충돌과 반목이 생기기도 하고 절충과 타협이 일어나기도 한다. 옛것을 유지하려는 힘은 긴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고 새것으로 바꾸려는 힘은 짧은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역자는 이런 예를 든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한지는 얼마 되지 않으니 재활용 기준에 다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짧은 시간의 힘이고 아무렇게나 버려 한꺼번에 매립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힘이다. 한동안 분리수거 체계가 확대되는 듯하더니 얼마전부터 각 생활거점에서 분리수거한 쓰레기들도 중간처리과정에서 다시 섞여 매립장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의 힘에 밀리는 듯했던 오랜 시간의 힘이 다시 승리하는 형국이다.”
브로델은 이렇게 역사를 시간의 지속에 따른 레이어로 나눠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우리 눈에 잘 띄고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대상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것들, 즉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브로델은 그러한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역사를 ‘표층의 역사’라 본다. 그러나 이 세계의 배후에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지속하는 ‘심층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ㅜ심층의 역사는 “밑바닥에서 표층의 역사를 떠받치고 또 제약하면서 천천히 밀고 나가는 육중한 힘을 행사하는 실체라고 브로델은 생각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는 아날 학파에서 장기지속이란 말로 통일되어 쓰인다. 장기지속은 사회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구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델이 말하려는 것은 어떤 시스템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것은 “무언가의 결합이고 건축물과 같은 모습이겠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마모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언가의 실재를 뜻한다.”
브로델은 표층을 조건짓는다는 의미에서 심층을 ‘장기지속하는 감옥’이라 부르기도 한다. 심층이 구조와 다른 점은 시간만이 아니다.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은 기든스 말하는 practical consciousness와 비슷하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수천 가지에 달하지만 아무도 결정할 필요없이 그것들 스스로 완수된다. 사실 이러한 일상적 관행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절반 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없이 많은 행동이 뒤죽박죽 누적되고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시대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를 대신해 결정한다.”
기든스는 무의식이란 용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상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자동화된 루틴을 말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핸들을 돌리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왔다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운전하면서 의식하는 것은 전화도 받고 잡담도 하고 음악도 듣는 의식의 표층에 떠있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갑자기 핸들이나 브레이크가 이상할 때 의식(discursive consciousness) 아래에 가라앉아 스스로 돌아가던 운전 루틴이 의식의 표층에 떠오른다. 일상어법에서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의식 표층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기든스는 이것과 (의식으로 떠올릴 수 없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구분하여 불러야 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기든스는 사회과학에서 구조라 부르는 것들이 자리잡는 곳이 바로 그가 practical conscioussness라 부르기를 제안한 곳이라 말한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시스템과 다르다. 시스템은 지금 여기에 실제하는 것이며 구조는 그 시스템을 짜기 위한 재료에 가깝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소쉬르가 말하는 langue에 가깝다. 언어의 통사, 음운구조, 의미론들이 그렇듯, 기든스가 말하는 구조는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인 시간위에 형성된다.
브로델이 장기지속을 심층 또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기든스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심층, 무의식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된 것들이 많다. 이처럼 수백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대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온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물질생활’이란 편리한 용어로 파악하려는 내용이다. 물질생활은 인류가 이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자신의 삶 아주 깊숙한 곳에 결합ㅎ해온 것이다. 마치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잇는 삶이다. 그래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1권을 써나가는 길잡이다.”
여기서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으로서의 물질생활은 기든스가 구조에 대해 말하듯 이중성(duality)을 갖는다. 하나는 조건으로서 구속하는 의미, 둘째는 “구조 자체를 만들어내고 또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을 뜻하는” 의미이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기지속은 곧 구조를 뜻한다’라고만 아해하기 곤란한 딜레마 같은 것 있다. 오랜 세월의 무게가 누적되어 형성되는게 구조라면 그 런 구조를 만들어내는 오랜 세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세월의 무게와 그로부터 형성된 구조가 아무리 무겁고 단단하더라도 세대를 거듭하는 ‘긴 시간대의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은 어느 한두 세대의 행위나 그들이 처한 조건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적이고 심층에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읽힌다.”
역자는 장기지속에 한가지 의미가 더 있다고 말한다. “브로델은’우리는 심층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으로 비추어 볼뿐입니다.’라고도 말한다.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은 역사를 기술하는 내용이나 결과라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또 한 그러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잇는 여러가지 비체계적인 재료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언가의 구조랄지 어떤 역사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낟. 오히려 그렇게 찾아낸 여러가지 재료에서 읽어내야 할 과제가 구조나 법칙이 될 것이다.”
여기서 브로델은 베버의 이념형을 도입한다. “그의 핵심논지는 이 세상에 언제 어디서나 즉 시공을 초월해 적용가능한 보편타당한 모덿은 없다는 것이다. 즉 모델은 관찰자가 눈여겨본 사회 환경에서 추출한 실재를 반영해 만든 일종의 가설이고 설명체계인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시험해봐야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델을 배에 비유하는 브로델은 일단 모델이라는 배를 만들면 역사적 시공의 물줄기에 띄워보는 시험항해를 한다고 말한다. 시험항해란 모델이 상정하는 실재, 즉 사료를 찾아 검증하는 일이다. 여기서 브로델은 역사적 시공의 구체성에서 이탈하는 보편타당한 모델을 배격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장기적인 연속성을 찾아 나서지 않고 단기적 사건에만 주목하느 태도도 배격한다. 브로델은 모델의 내용보다 모델을 활용하는 방법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잇다. 또 모델과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왕래를 위해 정밀한 개념의 모델보다는 되도록 많은 사실을 담아 비교해볼 수 있는 다소 느슨한 모델을 역사서술의 준거로 삼았다고 이애할 숭 ㅣㅆ다. 브로델이 역사 기술에 활용하는 모델들이 엄밀한 개념 정의 면에서 느슨한 혹은 과소결정된 것들이라는 점을 알아두는 것은 분량이 엄청난 그의 저서를 읽어나갈 때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15-18세기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공속에서 자본주의란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브로델은 두개의 모델을 시험한다. 첫째는 물질생활-시장경제-자본주의란 삼층집 모델이다. “브로델은 물질생활을 ‘물질문명’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러한 삶의 차원들은 아무 말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지만 이것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토대이다. 또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장기지속하면서 형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삼층집에서 일층에 위치함은 바로 그런 의미다. 물질생활은 거의 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사용가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브로델은 자급자족에서 탈피해 ‘교환가치의 문지방을 넘으면서부터 경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경제생활’이 시갖된다. 여기서부터 삼층집의 일층 위로 이층이 올라서기 시작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경제생활은 ‘교환의 세계’란 제목의 2권에서 다뤄지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르다 본다.
역자는 처음엔 브로델이 경제생활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라는 두층으로 나눤다고 본 것같다고 한다. 그러다 경제와 시장경제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자본주의는 별개의 한층으로 본 것으로 생각이 바뀐 것같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다른 이유로 브로델은 중국을 예로 든다. “기초적 시장 단계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시장을 조직한 곳은 분명 중국이다. 시장이 거의 수학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한 지리에 바탕을 두고 조직되었다. 가령 장이 서는 읍내나 작은 도시를 백지 위에 찍은 점이라 치면 그 주위로 뺑 돌아가며 여섯에서 열개의 마을이 위치한다. 이 마을들은 모두 농부가 읍내 시장에 갔다가 당일 내에 돌아올만한 거리에 자리잡고 잇다. 윌리엄 스키너는 중국농총의 생존을 결정하는 곳은 촌락 자체가 아니라 촌락을 아우르는 시장권이라고 했는데 옳은 지적이다. 이와 같은 읍들도 도시를 적절한 거리에서 감싸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도시의 위성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델은 중국은 자본주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교환의 상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로델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이 교환의 상층이다.
“18세기까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이 두형의 활동은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 무렵까지 인류가 영위하는 생활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생활’ 속에 잠겨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실재는 화려하고 섬세하지만 비좁은 층위에 속해 있었고 경제샐활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 뿐 아니라 “보통 ‘상업 자본주의’라 일컫는 구체제하의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전체를 장악하지도 못했고 마음대로 주무르지도 못했다.”
브로델은 삼층집 모델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장경제는 그 본성상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역할에 불과하니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19세기 이전에는 광대한 일상생활의 대양이 아래쪽에서 시장경제를 떠받치고 있었고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두번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위쪽에서 시장경제를 조작햇다. 즉 시장경제는 이 두층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층에 불과했다.”
그러면 왜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나누어 보는가?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반시장적이기 때문이라 브로델은 말한다.
시장에서의 “거래는 투명해서 놀랄만한 사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가 거래에 관한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잇고 이익도 항상 왠만한 정도엿기 때문에 사전에 개략적인 계산이 가능했다. 읍내에서 열리는 시장이 이러한 교환의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거래는 다르다. “중개인이 끼어들게 된다. 이 중개인은 기회를 노렸다가 상품을 사재기하고 재고 물량을 조작해서 시장을 교란하거나 지배하고 가격에 영향을 미쳤다.”
브로델은 교환의 세계는 수직적 위계로 나뉘어진다고 본다. “대체로 아래층에 속하는 동네에서는 시장경제의 모습처럼 투명한 경쟁이 이루어진다. 그 수직 사다리의 위로 올라갈수록 이러한 시장경제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교환의 영역이 펼쳐진다는 것이 브로델의 논점이다. 이 상층영역에서는 소수의 덩치 큰 선수들이 영악한 술수와 힘을 휘드르며 법규와 규볌을 우회하거나 무시하고 높은 이익을 독차지한다. 브로델은 경쟁의 힘이 작용하지 안ㅇㅎ는 이 별세상 같은 교환의 상층부를 반시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역의 활동을 도저히 시장경제로 봐줄 수도 없고 경쟁과 규범이 아니라 독점과 지배가 힘을 행사하는 곳이니 시장경제와는 정반대라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 영역이 ‘예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자본주의란 실체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브로델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곳에선 “소의 시장경제의 핵심법칙인 경쟁이 별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다음로 상인이 누렷떤 두가지 이점을 들 수 잇다. 하나나는 상인이 끼어들면서 생산자와 최종적인 상품 수요자의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시장의 양쪽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상인이 이득을 볼 가능성이 많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주된 무기인 현금이 항상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과 소비 사이에 기다란 상거래망이 형성된다. 이러한 상거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분명히 그 효율성 덕분이엇다. 특히 대도시에 물자를 공급하는데 효율적이었고 그 덕분에 정분에 정부 당국의 양해를 얻거나 적어도 규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거래 경로가 아주 먼 장거리로 늘어날수록 그만큼 통상적 규제와 간섭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쉬워졌고 자본주의적 과정이 더욱 선명하게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원거리 무역은 원하는대로 활동할수 있는 자유공간 그 자체였다.” 자유공간은 초과이윤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두둑한 이익에서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축적된다. 특히 원거리 무역은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했으니 자본축적이 빠르게 진행됐다. 이런 사업에는 아무나 참여할수없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든 기독교 세계에서든 이러한 자본가들이 군주와 가까운 사이였고 국가에 협조하면서 또 국가를 이용하는 존재엿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오래전 아주 일찍부터 국가의 경계를 넘어섰고 해외 상거래 중심지의 상인들과 손발을 맞추며 거래했다. 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왜곡할 수천가지 방법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식, 정보, 문화 면에서 누리는 우위를 바탕으로 주변에서 값나가는 것이면 무엇이든 장악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진보의 동력이라 볼 수 없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오히려 “모든 것이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서 잇다. 물질생활이 팽창하면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간다. 시장경제는 물질생활을 희생시키면서 그 자신은 빨리 팽창하고 또 자신의 관계망을 확장한다. 이렇게 시장경제가 팽창할 때 자본주의는 항상 이득을 본다. 나는 기업가를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해결사인 양 내세우는 슘페터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결정적인 것은 전체의 운동이며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간에 우선은 그 밑에서 받쳐주는 경제를 바탕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제국시대 중국정부들이 자본주의를 용인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엇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독점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그것은 힘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국가와 한 몸을 이룰 때에만 즉 자본주의가 국가가 될 때만 승리한다.” 자본주의는 권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권력이 될 수 없을 때 자본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명나라와 청날 때의 중국이 그러한 경우이다. 중국만큼 선명하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구체제의 프랑스 왕정도 그러한 경우이다. 프랑스 왕정은 상인들에게 특권적 역할을 주지 않았고 귀족으로 구성되는 지배적 위계를 가장 중시했다.”
자본주의가 권력현상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역사 자체가 증명한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서구에서 개인이 홀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역사는 똑 같은 교훈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즉 개인의 성공은 언제나 악착스럽게 재산과 영향력을 야금야금 키워가는 신중하고 세심한 가문의 자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재산과 권세가 축적되는 과정을 눈여겨보면 유럽에서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봉건체제에서는 영지를 차지하는 영주들의 가문이 혜택을 누렷다. 가장 기본적 재산인 토지를 봉건 영주들끼리 나워 갖는 것이 부를 안정적으로 할당하는 형태이기도 했고 봉건 사회의 맥락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햇다. 부르주아지는 수백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특권계급에 붙어 기생했다. 그들 가까이에 서식하면서 그들의 실수와 사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이용해 이 특권계급의 재산을 빼앗아간다. 그러다 결국 그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스스로 특권계급이 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는 봉건 사회에서 싹트기 시작해 여전히 절반은 봉건적인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사회적 특권이 비교적 잘 보호되기 마련이다. 그만한 지위에 오른 가문들은 비교적 별 탈 없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으로 취급된다. 그래야만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을 벗어나면 그런 특권의 안정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엿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중국의 경우는 과거제도 때문에 특권계급의 문호가 열려 있었고 사회적 이동성이 훨씬 컸다. 특권계급이 되면 “재산을 모으게 되지만 그 재산이란 것 유럽에서처럼 커다란 가뭊ㄴ을 일으킬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재산이 아주 많거나 권세가 큰 가문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감시를 받는 표적이 되엇다. 국지적으로 상인과 부패한 관리가 공모하는 일이야 늘 있었지만 중국의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확산에 적대적이엇다.중국의 진정한 자본주의는 중국 밖에서만 존재했다. 예를 들어 동남아 군도에서는 중국 상인이 완전히 자유를 누리며 행동하고 군림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수직적 위계를 필요로 한다. 즉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그 사회적 조건이란 사회적 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아니면 허약하거나 호의적이여야 한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이다. 모든 것이 다 갗춰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한다. 달리 말하면 수직적 위계라는 문제 자체는 자본주의 너머의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출현하기에 앞서 존재하며 자본주의를 통제한다.”
이렇게 본다면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은 생산양식인가?” 브로델은 자본주의란 용어 자체를 마지 못해, 달리 쓸 말이 없기에 쓸 뿐이다. 아마도 그런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고유한 요소들을 스스로 번식해가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역자는 그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라는 것은 생산양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브로델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의 바깥보다는 위에 존재하면서 생산양식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존재. 즉 그가 말하는 최상층의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브로델은 19세기 들어 자리를 잡은 산업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이고 이전의 상업자본주의는 가짜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시각에 반대한다. 상업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는 없었으며 19세기 이전이든 이후이든 19세기 중에든 금융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상업자본주의는 늘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어디에서 높은 이익이 생기느냐에 따라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우선적 분야나 투자가 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3층집 모델을 “지리적 공간에 횡적으로 펼치고 그 공간에 중심부-중간부-주변부라는 계층적인 지배-종속 관계를 더하면” 세계-경제(World-economy 역자는 경제계란 번역어를 제시한다.) 모델이 된다. “중심부에도 자본주의-시장경제-물질생활의 삼층집이 있고 중간부와 주변부에도 각각 삼층집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브로델의 논의를 따라가보면 결국 중심부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본주의가 경제계 전체를 조직하는 힘을 발휘화는 곳이 된다.”
삼층집 모델과 경제계 모델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본 후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 세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는 여전히 국제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차원과 세계적인 규모에서 존재한다. 적어도 세계 전체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커다란 관심사가 무엇인가? 바로 이 세계주의의 판을 다시 짜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법에 근거한 것이든 관행에 근거한 것이든 여전히 독점에 의존한다. 독점이라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반대가 빗발쳐도 자본주의는 집요하게 독점을 유지한다. 조직이 여전히 시장을 우회하고 있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들여온다. 이런 문제가 정말로 새로운 사실이라고 여긴다면 잘못된 것디다.
셋째 사람들이 늘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결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결코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 속에 이 두 가지-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다 주워 담지 않는다. 앞에서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로 구분하는 삼중 구조를 제시했다. 이 모델은 서로 다른 것을 구분하고 설명하는 놀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 대한 브로델은 총평은 이러하다. “최악의 오류는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이라고만 여기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회질서를 이용해 생존하고 애초부터 육중한 상대자였던 국가와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또 사회구조를 지탱해주는 문화의 역할도 이용한다. 소수의 특권으로서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와 능동적으로 공모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질서의 한 실재이고 정치질서의 한 실재이기도 하며 문명의 한 실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그 실체는 인접한 영영과 그 영역들에 침투한 모습을 비추어 보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그때에야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