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검은과부거미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터널에서만 살아온 주인공 다형은 무피귀를 피해 섬 깊숙이 들어가면서
뜻밖의 인물, 그리고 사실 들과 조우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섬을 장악한 무피귀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 섬에서 생존자들을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궁금한 점들이 많았는데
읽다 보면 대부분 해소가 되고, 설정들도 굉장히 흥미롭다.
사실 초반에는 열여섯살짜리 여자 아이 혼자
500여명에 달하는 터널 속 사람들의 생존이 걸린 여정에 나선다는 설정이
(게다가 어떤 어른 하나 만류하지 않는다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위험부담을 누구에게라도 떠넘기고 싶어지는 치졸한 심리나
다형이 이미 터널 안에서도 많은 일들을 도맡아왔고,
사람들은 거기에 익숙해져 그런 다형을 의지해왔을 상황을 헤아리다 보니
그리 말도 안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널 안에서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황필규가 소설의 대표 빌런 중 한 명이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쥐와 구데기를 먹으며 연명해가는 와중에
자신과 자식들만 배불리 먹으며 살이 올랐다는 대목을 읽으며 눈살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개인적 원한으로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다형을 사지로 몰려는 점도...
결말에 다다라 자신의 인간성에 걸맞는 최후를 맞는다는 점이 통쾌했다.
같은 장르에서 종종 등장하는 클리셰가 소설에서도 등장하곤 하는데
(알고보니 다른 생존자들이 있었다는 것, 괴물의 변종이 있었다는 것 등등)
클리셰를 묘하게 비껴간 장면들도 많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예컨대 승하를 따라 바리섬으로 간 다형을
사람들이 굉장히 적대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무피귀 감염 위험성)
생각보다 따스히 환대하고 호의를 베풀어주는 다정함 같은 것들.
또 수용소에서 만난 준익과 다른 '언더원'들의 모습도.
따라서 무피귀와의 전투가 아닌 인물들이 유발하는 스릴감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 적절히 긴장감을 유발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중후반부에 '조태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반전과 더불어
굉장히 크리피한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소설은 무피귀에 대한 묘사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3m가 훌쩍 넘는 거구에 근육과 뼈가 드러나는 피부, 돌출된 안구라니...(ㄷㄷ)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 비주얼인데다 이어지는 추격 상황들도 생생하게 그려져
더욱 공포감을 느끼며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스위트홈>도 그렇고 크리처물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충격적인 괴물의 '비주얼'이 아닐까?
만약 영상화가 된다면 구현될 '무피귀'의 비주얼 역시
여느 크리처물 속 괴물들 만만찮게 공포스러울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반무피귀 '준익'이다.
무피귀들에게 쫓기다 위험에 처한 다형과 승하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러나 반은 괴물이고 반은 인간인 비주얼로 충격을 주었던 준익.
그를 통해 과거 무피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반무피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 '싱아'를 정성껏 보살펴 왔는데
다형과 승하가 찾아오자 위 대목처럼 이야기하며 싱아를 부탁한다.
실험의 희생양으로 인간도 괴물도 아닌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인간성'만은 상실하지 않은, 인간보다도 인간같은 괴물이라니...
다형과 사람들이 내륙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고 나서도
섬에 남아있을 준익을 포함한 반무피귀들이 눈에 밟혔다.
'언더원'으로 자신들을 칭하며 인간과 소통 가능한 이들과 인간과의 공존은 불가능한 걸까...
이성을 가졌지만 육체 능력은 초인적인 이들 존재가 무피귀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키가 될 법도 한데...!
모쪼록 이 궁금증을 풀어줄 다음 이야기가 얼른 나와주었으면 싶다.
소설 중반, 공포의 대상인 무피귀가
인간들의 욕심이 초래한 결과였음이 밝혀진다.
또 때로는 괴물 보다 더 괴물같은 인물들이 위험을 야기하기도 한다.
긴박하게 벌어지는 괴물과의 사투, 액션신과 더불어
절망적인 상황 속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인간 군상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이다.
더불어 끝끝내 '우리'를 선택하며 절망을 물리치는 이들의 모습도.
희박한 희망 속, 인간답게 살아남는 일은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버려야만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지켜야 할 대상을 나에서 우리로 확장시킬 때라야 비로소 연대는 가능해지고,
희망이 싹을 틔울 수 있음을 소설은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