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하룻밤 자자"
그녀가 말했다. 개들이 몸을 웅크리고 잠들자 우리는 옆 바닥에 누워 잤다. 우리를 둘러싼 동물들이 우리가 동경하던 삶이자, 우리가 원하던 친구이며, 그 시절 런던에서 불필요하고도필수적이며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순간이라는 듯이 깨어나 보니 개 한 마리가 갸름한 얼굴을 내 얼굴 옆에 누인 채 꿈속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차분히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다 잠에서 깬 나의 숨소리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고눈을 뜨더니, 자세를 바꾸고는 앞발을 내 이마에 살짝 내려놓았다. 나를 향한 세심한 연민이나 우월감을 뜻하는 제스처 같았다. 그 손짓이 지혜롭게 느껴졌다.
"넌 어디서 왔어? 어느 나라? 말해 줄래?"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애그니스가 옷을입은 채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서서 내가 하는 행동을지켜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榮輝월즈엔드의 애그니스. 애그니스 스트리트의 애그니스 밀힐의 애그니스 칵테일 드레스를 잃어버렸다던 라임버너 야드의 애그니스. 내 삶에서 이 부분은 화살도 나방도 공유해서는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사라진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애그니스의 세상은내가 홀로 도피하는 곳이었다.- P119
그는 애그니스의 부모님과도 잘 지냈지만 애그니스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애그니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화살의 눈으로 그녀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면면을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식사 후 애그니스는 우리를 배웅하러 아파트 계단을 함께 내려가 차 앞까지 갔다. "그럼 그렇지! 저번에 개들을 데려왔던 그모리스네!" 화살에게 아버지 행세를 시키면서 내가 느꼈던 초조함은 그녀의 한마디에 잦아들었다. 그날 이후로 애그니스와나는 내 아버지의 과장스러운 예의를 언급하며 킥킥거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가짜 아버지가 빌린 바지선을 누나와 함께타고 강을 떠다닐 때면 우리 셋이 그럴듯한 가족으로 보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P139
화살은 신문이나 개 경주 소식지를 볼 때면 다리를 꼬고앉아 한쪽 허벅지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피곤한 사람처럼 한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었다. 늘 똑같은 자세였다. 어느 날 오후 배를 탈 때 애그니스가 일요 신문의 흥미진진한 기사들에파묻혀 있는 화살을 스케치하는 것 같길래, 나는 일어나서 그녀 뒤를 지나쳐 걸어가며 그림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폭풍이불던 날 정육점 포장지에 그려 준 그림을 제외하고 내가 본 그녀의 유일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그림에 담긴사람은 화살이 아니라 나였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 자기 자신을 아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타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그 사람이 내 진짜 모습, 혹은미래의 내 모습인 듯했다. 그때도 나는 그 그림이 진실을 담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나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나에 대해 그린 그림이었다-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