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토프가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이모에게 인사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였고, 니콜라이가 그녀 쪽으로 돌아섰을 때 마침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시선을 맞았다. 그녀는 품위와 우아함이 넘치는 동작으로 기쁜 미소를 지으며 반쯤 몸을 일으켜 가늘고화사한 손을 내밀고는 비로소 처음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듯한여성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객실에 있던 부리엔 양은놀라 의아한 눈길로 공작영애 마리야를 바라보았다. 교태에 능란한 이여자도 자신을 꼭 좋아해주길 바라는 남자를 만났을 때 이보다 더 훌륭한 태도를 취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검은 옷이 잘 어울려서일까, 아니면 저렇게 아름다워졌는데 내가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어쨌든 대단하다. 저 몸가짐과 우아함은!‘ 부리엔 양은 생각했다.
만약 이 순간 공작영애 마리야가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부리엔 양보다 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놀랐을 것이다. 그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본 순간부터 그녀는 일종의 새로운 생명력에 사로잡히고, 의지와 관계없이 말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로스토프가 들어오자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변했다. 색칠되고 조각된 초롱 안에 불을켜면 그전까지 조잡하고 거무스름하고 무의미해 보이던 표면에 복잡하고 정교한 예술적인 도안이 홀연 놀라운 아름다움을 띠며 떠오르듯공작영애 마리야의 얼굴도 갑자기 변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순결하고영적인 그녀의 정신활동이 비로소 표면에 드러난 것이었다. 스스로는불만스러웠던 자신의 정신활동, 즉 고뇌, 선에 대한 갈망, 순종, 사랑,
자기희생 같은 모든 것이 지금 반짝이는 눈에, 섬세한 미소에 부드러- P41
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잠자리에 들기에도 너무 일러서 그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지나온 인생을 곰곰이 생각하며 한참동안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공작영애 마리야는 스몰렌스크 교외에서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전에 그런 특별한 상황에서 만났다는 것도, 어머니가 한때 부유한신붓감으로 지목한 사람이 그녀였다는 것도 그녀에게 특별히 주의를쏟게 했다. 보로네시에서 그녀를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은 유쾌할 뿐만 아니라 강렬했다. 니콜라이는 그때 그녀에게서 특별한 정신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깊이 감동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떠날 채비를 하고있었고, 보로네시를 떠나면 공작영애를 만날 기회를 잃게 되지만 유감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공작영애 마리야를 만난 것은그의 예상보다 훨씬 깊은(니콜라이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마음의 안정을 위해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창백하고 가냘프고 슬픈 얼굴, 그 반짝이는 눈, 조용하고 우아한 몸짓, 특히 그녀의 몸 전체에 흐르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깊고 부드러운 슬픔은 그를 불안하게 하고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로스토프는 남자에게서는 이런 높은 정신적 생활의 발현을 보는 것이 싫었고(그래서 안드레이 공작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철학이다 공상이다 하며 멸시했지만, 공작영애 마리야에게서는 그 자신과 영 거리가 먼 정신세계의깊이를 오롯이 드러내는 슬픔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던것이다.
‘분명 훌륭한 아가씨일 것이다! 마치 천사 같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왜 나는 자유로운 몸이 아닐까, 왜 소냐에게 그토록 서둘렀을까?‘- P47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갖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되는 정신적 자질로 보자면, 한쪽은 빈곤하고 다른 한쪽은 풍부했다. 그는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라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어떻게 공작영애에게 청혼을 하고, 어떻게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될까? 아니, 그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무서운 마음이 들고, 뚜렷한 그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소냐와의 미래 그림은 별써 한참 전에 그려보았고, 모두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데다 소냐 안에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하고 뚜렷했지만, 공작영애마리야와의 미래는 그가 그녀를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소냐에 관한 공상에는 어딘지 모르게 재미있는 소꿉놀이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공작영애 마리야를 생각하는 건 늘 어렵고, 조금은두렵기도 했다.
‘기도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땠는가!‘ 그는 생각했다. ‘온 영혼을 기도에 쏟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산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기도이며, 나는 그 기도가 반드시 실현되리라 확신한다. 나는 왜 나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로써 구하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내게필요한 것은 뭘까? 자유다. 소냐와 이별하는 것이다. 그녀가 한 말이옳다. 그는 도지사 부인이 한 말을 상기했다. ‘그녀와 결혼한다면 불행뿐일 것이다. 혼란, 어머니의 슬픔...... 재정 문제...... 혼란. 무서운 혼란! 그리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 아 하느님! 이 무섭고 출구도 없는 상황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그는 갑자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기도는 산도 움- P48
직인다는데, 믿어야 한다. 어린 시절 나타샤와 함께 눈이 설탕이 되게해달라고 기도하고 정말 설탕이 되었는지 맛보러 뜰로 뛰어갔던 것처럽 기도해서는 안 된다. 아니다. 나는 지금 그런 부질없는 기도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파이프를 방 한쪽에 놓고, 두 손을 모으고 성상앞에 서며 자신에게 말했다. 공작영애 마리야에 대한 회상에 감동한그는 전에 없이 열심히 기도했다. 그의 눈과 목구멍에 눈물이 차올랐을 때, 하인 라브루시카가 서류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들어오는 거야!" 니콜라이는 급히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도지사님한테서." 라브루시키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급사가왔습니다. 편지입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가봐!"
니콜라이는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한 통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었고 또 한 통은 소냐의 것이었다. 그는 필적으로 알아보고, 먼저 소냐의 편지를 뜯었다. 몇 줄 채 읽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은놀라움과 기쁨으로 커졌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곳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편지를 들고 읽으며 방안을 걷기 시작했다. 대강읽은 뒤 한번 더 읽고, 또 한번 읽은 뒤 어깨를 추썩이고 양손을 벌리며, 입을 벌리고 시선을 한곳에 못박은 채 방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하느님이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방금 그가 올린기도가 실현된 것이었지만, 니콜라이는 그것이 뭔가 심상치 않고 전혀예상하지 못했던 일인 양 놀랐고, 이토록 빨리 실현된 것은 그가 기도- P49
분과 지위를 밝히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했다. 피예르는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피에르가 어떤 결심을 하기도 전에 다부는 고개를 들고 안경을 이마로 밀어올리더니 실눈을 뜨고 피예르를 쏘아보았다.
"나는 이자를 알아." 분명 피에르를 놀래줄 심산으로 그는 침착하고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소름끼치는 한기가 피에르의 등골을 스쳐가더니 바이스처럼 머리를 쥐었다.
"장군, 당신이 저를 아실 리가 없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자는 러시아 스파이야." 다부는 피에르의 말을 가로막더니 예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방안에 있던 다른 장군에게 말했다. 그리고다부는 얼굴을 돌렸다. 피에르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듯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는 문득 다부가 대공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고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당신이 저를 아실 리가 없습니다. 저는 민병장교이고, 모스크바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다부가 물었다.
"베주호프입니다."
"당신 말이 거짓이 아닌지 내게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전하!" 피에르는 화를 낸다기보다 애원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부는 눈을 들고 피에르를 골똘히 보았다. 몇 초간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고, 이 응시는 피예르를 구했다. 이 응시로 두 사람 사이에전쟁이나 재판이니 하는 모든 조건을 초월한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 P63
었다. 이 순간 그들은 막연하지만 수많은 것을 느끼고 자신들이 인류의 자식이자 형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인간의 행위와 목숨이 번호로 불리는 명부에서 고개를 들어 다부가•처음 피예르를 일별했을 때, 피예르는 한낱 상황에 지나지 않았으므로다부는 악행을 한다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총을 쏠 수도 있었지만, 지금 그는 이 남자 속에서 일개의 인간을 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 말이 사실인지 내게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다부는 냉정하게 말했다.
피에르는 랑발이 떠올라 그의 이름과 소속 연대, 숙사가 있는 거리이름을 냈다.
"당신은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다부가말했다.
피에르는 끊기고 떨리는 목소리로 진술의 사실성을 증명할 증거를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부관이 들어와 다부에게 무엇인가 보고했다.
다부는 부관의 보고를 듣자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더니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피예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부관이 포로에 대해 환기하자, 다부는 눈살을 찌푸리고 피에르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데려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피에르는 바라크로되돌아가는 것인지, 데비치에 들판을 지날 때 동료들이 가리킨 완전히준비된 형장으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부관은 다부에게 무엇인가 되묻고 있었다.- P64
"그래, 물론이지!" 하고 다부는 말했는데, 피에르는 ‘그래‘가 무슨뜻인지 알지 못했다.
피에르는 어떻게, 얼마나, 어디로 걸어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완전한 무감각과 우둔의 상태로 주위의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을 옮길 뿐이었는데, 일동이 걸음을멈추자 그도 멈췄다. 그동안 피에르의 머릿속에는 내내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그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을 선고한 것이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위원회에서 그를 심문한 자들은 누구도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아닐 것이었다. 그토록 인간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다부도 아닐 것이었다. 만약 일 분만 더 있었다면 다부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겠지만, 그 순간에 부관이 들어와 방해를 했던 것이다. 그 부관도 분명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고, 그때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체 누가 최종적으로 사형을 명령하고, 그를 죽이려는 걸까-모든 기억, 갈망, 희망, 사상을 지닌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걸까? 누가 그것을 했을까? 피에르는 그것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질서이며, 온갖 상황의 집적이었다.
어떤 질서가 그를, 피예르를 죽이려고, 생명과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말살하려고 하고 있었다.- P65
"지금 외운 건 무슨 기도인가?" 피에르는 물었다.
"엉?" 플라톤은 말했다(그는 벌써 잠들기 시작했다). "뭘 외웠느냐말입니까? 하느님께 기도했죠. 당신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나도 하지." 피에르는 말했다. "그런데 자네가 말한 프롤라와라브라가 뭔가?"
"그거잖습니까" 하고 플라톤은 재빨리 대답했다. "말의 축일". 가축들도 불쌍히 여겨줘야 하니까요." 카라타예프는 말했다. "요놈 봐라.
장난꾸러기, 돌돌 말고 누웠군. 따뜻하지, 요놈 자식." 그는 발치에 누운 개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더니 이내 돌아누워 잠들었다.
밖에서는 어딘가 멀리서 울음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바라크 틈새로불빛이 보였지만, 안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피에르는 오랫동안 잠을이루지 못하고 옆에서 잠든 플라톤의 규칙적인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고, 마음속에서는 조금전에 붕괴되어버린 세계가 다시 새로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전과는 다른 튼튼한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을 느꼈다.- P78
이 비교적 느린 각성에는 무서운 것도 날카로운 것도 없었다.
안드레이 공작의 마지막 날과 시간은 평범하고 단조롭게 지나갔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던 공작영애 마리야와 나타샤도 그것을 느꼈다.
그들은 울지도 떨지도 않았고, 임종이 다가오자 그것을 직감하며 이제더는 그가 아니라(그는 이미 없었고, 그들을 떠나버렸다) 그에게 가장가까운 추억인 그 육체를 돌보았다. 두 사람의 이런 감정이 너무도 강- P103
렬했기 때문에 죽음의 무서운 일면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은 자신의 슬픔을 자극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앞에서도 그가 없는 곳에서도 울지 않았고, 서로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드레이 공작이 점점 더 깊이, 천천히, 조용히 그들을 떠나어디론가 내려가는 것을 보았고, 그래야 하고,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았고, 모두 마지막 작별을 하기 위해 그의 곁으로 갔다. 이들을 데려오자 그는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것은 괴롭거나 슬퍼서가 아니라(공작영애 마리야와나타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요구된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었고, 아들을 축복해주라고 하자, 하라는 대로 한 뒤 또다른 할 일이있는지 물어보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혼이 떠나가는 육체의 마지막 경련이 일었을 때, 공작영애 마리야와 나타샤는 그곳에 있었다.
"돌아가셨군요?!" 그가 몇 분 동안 아무 움직임도 없이 차가워지며그들 눈앞에 누워 있자, 공작영애 마리야는 말했다. 나타샤는 다가가서 생명을 잃은 눈을 잠시 보고, 서둘러 눈을 감겨주었다. 그녀는 눈을감겨준 뒤 그의 눈에 키스하지 않고 그에 대한 가장 가까운 추억이 된그의 몸,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지금 어디 있을까?.......
염을 하고 옷을 갈아입힌 유해가 탁자 위의 관에 입관되자 모두 마- P102
지막 인사를 하러 다가가서 울었다.
니콜루시키는 마음을 찢는 듯한 괴로운 당혹감에 울었다. 백작부인과 소냐는 나타샤에 대한 동정과 이제 그가 세상에 없다는 생각에 울었다. 노백작은 자기도 머지않아 이 무서운 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생각에 울었다.
나타샤와 공작영애 마리야도 이제는 함께 울었는데, 자신들의 개인적인 슬픔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난 단순하고도 엄숙한 죽음의 신비, 영혼을 사로잡은 그 경건한 감동 때문에 울었다.-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