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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님의 서재
  •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 13,500원 (10%750)
  • 2000-10-02
  • : 34,303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갖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나는, 역시 말없이 그녀의 곁에서 잠자코 걷기만 했다.
21p
"어째서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어깨의 힘을 좀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에서 함을 좀 빼면 훨씬 몸이 가벼워지잖아."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하고 그녀는 몹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뭔가 아주 잘못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 말해 줘?" 하고 그녀는 꼼짝 않고 시선을 발끝의 땅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어깨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런 말은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구. 알겠어?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난단 말이야. 난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한번 힘을 빼고 나면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구. 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딘가로 날려가 버리고 말 거야. 자기는 왜 그런 걸 모르는 거야, 응?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 준다는 말을 할수가 있어?"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난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혼란에 빠져 있어. 어둡고 차갑고 혼란스럽고...... 어째서 그때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거야? 말해 줘. 왜 나를 내버려두지 못했지?"
22p
그러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져 가고,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어쩌면 내가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서는 부드러운 진창으로 변해 버린 건 아닌가 하고.
...
하지만 이젠 나도 알게 됐다. 결국 따지고 보면-하고 나는 생각한다-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건,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다는 것을.
24p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약간 실망한 것 같았다.
"그것과는 또 달라" 하고 그녀는 말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43p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네 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고.
49p
아마도 그녀는 나에게 뭔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뿐일 거라고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자기 안에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머리핀을 만지작거리고,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기도 하고, 내 눈을 물끄러미 의미도 없이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56p
남과 같은 걸 읽고 있으면 남과 같은 생각 밖엔 못하게 돼.
59p
그는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별수 없는 속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낙천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그 마음은 고독하게 음울한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이율 배반성을 처음부터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어째서 그의 그런 면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나름의 지옥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61p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했어. 1년 내내 백 퍼센트 내 생각만 하고 사랑해 줄 사람을 내 힘으로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초등학교 5학년이던가 6학년 때 그렇게 결심했어."
"대단하군!"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그래, 성과는 있었어?"
"어려운 일이지"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그리고 연기를 바라보면서 얼마 동안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일지도 몰라. 난 굉장히 완벽한 걸 원하고 있거든. 그래서 어렵다고 생각해."
129p
"흥분하고, 울고. 그래도 차라리 그런 상태는 좋은거야. 감정을 드러내 보이니까. 무서운 건 노출이 안 될 때거든. 그렇게 되면 감정이 몸 속에 쌓이고 점점 굳어 가는 거야. 온갖 감정이 뭉쳐 몸 속에서 죽어 가지. 그 지경이 되면 큰일이야."
186p
"저 말이야, 와타나베"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너도 기즈키를 좋아했지?"
"물론" 하고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 언니는 어때?"
"그 사람도 좋아해.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왜 넌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야?"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우린 모두 어딘가 휘어지고, 비뚤어지고, 헤엄을 못 쳐서 자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가기만 햐는 인간들이야.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언니도, 모두 그래. 어때서 좀더 정상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거야?"
"그건, 내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오코나 기즈키, 레이코 씨가 어딘지 비뚤어져 있다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거든. 내가 생각하는 어딘가 비뚤어진 사람들은 다들 힘차게 바깥 세상을 활보하고 있어."
224p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어.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체계화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 재능을 무산시켜 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들말야."
238p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 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에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3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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