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나와 열 살 정도 차이 나는 선생님이 한 분 있다. 자기는 직장과 집 밖에 몰라서 사회에 나가면 바보가 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취미를 가지거나 모임에 나가보지 그래요?” 갱년기가 시작되며 잠도 잘 못 자고 에너지가 없단다. <오십에 발레를 시작하다>라는 부제를 보자 마자 그 선생님이 생각났다. 아직 사십 대 초반인 나는 오십을 알지 못하지만 오십이라는 나이에 발레를 시작한다는 것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희 작가의 <어떤 꿈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를 사실 소설일 거라 근거 없이 짐작하고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책 소개를 살펴보니 ‘에세이’라고 친절하게 적어 놓았음에도 건성으로 보았던 탓이리다. 이 책은 작가가 발레를 시작하여 2년 가까이 발레를 배우면서 있었던 경험을 생각과 연결하여 풀어내고 있는데, 책을 읽을수록 드라마 ‘나빌레라’와 얼마 전에 읽었던 안희연 작가의 ‘단어의 집’이 떠올랐다. 책은 에세이지만 발레를 배우는 과정의 묘사가 상세하여 드라마에서 덕출 할아버지가 발레를 배우는 장면과 오버랩 되어 자꾸만 그림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기술 방식이 경험과 그 경험으로 인해 떠오른 과거의 다른 사연의 소환 또는 반성으로 이어지는 성찰이어서 비슷한 기술 방식의 ‘단어의 집’이 떠오른 것 같다.
사실 ‘단어의 집’은 앉은 자리에 다 읽었지만 익숙치 않은 단어와 억지스런 연결 같은 느낌이 들어 썩 괜찮게 읽지는 않았다.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책은 작가의 경험과 성찰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에피소드들이 1인칭 시점의 소설로 시작하는 일기 같아서 재미와 공감, 그리고 반성과 감동이 있어 좋았다.
며칠 전, 비슷한 크기와 쪽수의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이 책도 금세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순식간의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다. 일단 필력이 너무 대단하다. 간단히 묘사하거나 직설적으로 말할 수도 있는데 정희 작가의 글은 따뜻하면서 위트가 있고 참신했다. 그래서 쉬이 넘기지 못하고 다시 읽고, 띠지를 붙여 표시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고 ‘이 작가. 나랑 비슷한데?’하는 부분이 많아 나의 과거와 이어지는 회상이 계속해서 소환되어 시간을 많이 뺏기게 되었다. 여전히 옹졸하고 편견이 심한 나여서 작가의 성찰에 반성하며 ‘연륜이란 무시 못 하는 거구나. 그래서 책을 읽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 포커페이스를 장착하고 그렇지 않은 척 음흉한 구석이 있는데 작가는 ‘부끄럽지만~’을 붙이면서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왜 작가처럼 솔직하지 못할까?’ 계속 되묻게 된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나 자신도 잘 몰라서’였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그만큼 사색을 하고 자기의 내면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기술도 할 수 있고 솔직할 수도 있지 싶다. 나는 아직 나에게 그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서 그럴테고. 가끔 기분은 안 좋은데 그 이유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같은 이유로 이 책은 그런 나의 기분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아 좋았다.
<어떤 꿈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는 작가 개인의 경험담을 풀어낸 에세이지만 내게는 나의 이렇게 생겨 먹은 성격을 인정을 해 주고, 요즘 고민이 되고 있는데 인간 관계에 대한 화두에 답을 주고, 과거에 철없이 저질렀던 과오들을 반성하게 해 주는 심리 상담사 같은 책이었다.
사오십 대가 아니더라도 그 나름의 나이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자기만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 같아 에세이를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런 나의 편견을 고쳐 먹게 만들었다.
p209. 부끄럽지만 그랬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바라면서도 차가운 가슴으로 냉정하게 그들을 재단했다.
내가 그러고 있다. 2024년을 코 앞에 둔 지금, 나도 ‘일단 멈춤’의 시간을 가지면서 모든 것에 자신만만했던 나를 좀 내려놓고 주위를 찬찬히 살피는 내가 되어야겠다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