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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읽히는' 소설과 '읽히지 않는' 소설이 있다. <왕비의 이혼>은 기본적으로 잘 '읽히는' 소설이다. 잘 읽히지 않은 소설을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며, 또는 가슴을 짓누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잘 읽히는 소설을 읽으며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왕비의 이혼>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것은, 아마도 이야기의 주제와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현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시종 그 시대의 인물과 지리, 사건과 사회질서의 디테일들을 친절하게 해설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은 현대를 무대로 한 소설로 그대로 옮겨놓아도 아무 무리가 없다. 15세기 말 프랑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당시의 학생들과 교수들, 재판관들의 캐릭터가 현대의 학생들과 교수들, 재판관들의 그것과 이 소설만큼 비슷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생각건데, 이 소설의 큰 틀은 15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하든, 20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하든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소설의 재미는 상당 부분 희석될 것이 분명한데, 이는 이 소설의 현대적인(즉 허구적인) 부분을 제외한 '완전히 역사와 일치하는' 사실들을 이해하는 재미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허구적인 현대와 사실적인 역사를 기능적으로 분리하는 <왕비의 이혼>의 방식은 이 소설이 깊이 있는 역사소설이 되는 것을 막는 요인이다. 아마 사토 겐이치는 그런 깊이 있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버렸거나, 또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이런 방법으로 이야기의 '익숙한 재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런 선택이 가능한 것은 이것이 '일본 소설'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단지 소설의 소재로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좋고 싫고를 떠나 이것이 일본의 특징이다. (자신들의 역사가 아닌 중세 유럽의 역사를, 그것도 이념이나 철학이나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단지 이야기의 '소재'로 쓸 수 있다는 것도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덕분에 이런 신기한 소설이 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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