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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뇌르의 서재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마르셀 프루스트
  • 15,300원 (10%↓850)
  • 2014-04-15
  • : 1,723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일과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는 그 기나긴 항해에서도 유독 눈부시고 감각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구간인 동시에,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완독하기 쉽지 않은 난관이기도 하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가 유년기의 기억과 풋사랑을 다루었다면, 2편에 해당하는 이번 권에서는 발베크 해변을 배경으로 예술에 눈뜨는 과정과 찬란한 청춘의 순간, 그리고 사랑과 존재의 본질을 향한 깊고 예리한 성찰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노르망디의 휴양지 발베크로 떠난다. 새로운 공간에서 그는 사랑과 예술,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층 넓혀간다. 전편까지 머릿속의 상상과 동경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 이번에는 실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눈앞의 풍경을 마주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경험한다.



'바다들'은 매번 하루도같은 모습인 적이 없었으니까. 다음 날이면 다른 바다가 나타나고, 이따금 전날 바다와 비슷할 때도 있었지만, 같은 바다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P. 112



발베크의 바다는 이 작품을 대표하는 이미지처럼 다가온다. 화자에게 바다는 결코 매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날씨,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프루스트의 세계에서는 사람 역시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라기보다 그 사람 위에 덧씌운 기억과 욕망, 상상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하고 그는 전문가다운 단호하고도 거의 단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입니다."

P. 209



4권에서는 이후 이야기를 이끌어갈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금빛으로 빛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경멸하는 귀족 청년 생루가 있고, 위험한 불빛을 머금은 듯한 눈빛 뒤에 속내를 감춘 샤를뤼스 남작도 있다. 과장된 맹세와 허풍을 일삼는 블로크 역시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샤를뤼스가 화자에게 무례하게 대한 뒤 물망초가 새겨진 책을 보내오는 장면은 짧지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가운데 사랑의 속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알베르틴이다. 처음에는 해변을 돌아다니는 소녀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지만, 화자는 그녀를 바라보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마음속에 수많은 알베르틴을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실제의 알베르틴보다 화자의 기억과 욕망,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알베르틴의 존재가 점점 더 커진다. 결국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사람에게 투영한 자신의 욕망과 상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여인에게 우리 영혼상태를 투사하는 일일 뿐이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여인의 가치가 아니라 그 상태의 깊이다. 그리고 어느 평범한 소녀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훌륭한 사람과의 대화나, 그 작품에 대해 감탄하며 감상할 때의 기쁨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깊이가 있으며 본질적인 우리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우리 의식이 닿게 해 준다는 점이다.

P. 320




사랑은 상대를 발견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보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이미지를 덧씌우는지가 사랑의 크기와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는 사랑을 아름답게만 그리지 않는다. 화자가 날마다 말을 걸고 마음속에서 대답하게 했던 상대는 실제 알베르틴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알베르틴에 가까웠다. 해변에서 마주한 실제의 그녀는, 화자의 내면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긴 공연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배우에 불과했다. 이 통찰은 사랑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과 상상을 투사하는 일에 더 가깝다는 결론에 이른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를 읽으며 "잃어버린 시간"이란 단순히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흘려보낸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와 같은 바다가 없듯 어제와 같은 나 역시 없다. 순간마다 풍경도 달라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 자신도 달라진다.


긴 문장을 따라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그렇게 시간을 들여 읽고 나면 평범했던 풍경과 감정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한 권을 다 읽은 뒤 마음에 남는 것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다. 바다 위에서 시시각각 달라지던 빛, 해변을 지나가던 소녀들의 모습,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마음처럼 쉽게 사라질 법한 작은 순간들이다. 프루스트는 바로 그러한 순간들이 쌓여 한 사람의 기억이 되고, 마침내 한 사람의 시간이 된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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