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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뇌르의 서재
  • 상상 속의 삶
  • 앤드루 포터
  • 17,820원 (10%990)
  • 2026-06-04
  • : 22,730

<상상 속의 삶>은 어린 시절 갑자기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스티븐은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죽음으로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버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부재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스티븐의 마음 한편에 남아 그리움과 원망,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그림자가 된다.


"있잖아, 어떤 사람은 우리 삶에 잠시 들어왔다가," 어머니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고, 물위에 햇빛이 반짝였다. "그냥 그렇게—" 어머니는 머리 위로 손을 거칠게 내저었다.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거야."

146쪽



어머니가 했던 이 말처럼 누군가는 삶에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에게 그 부재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스티븐에게 아버지의 실종은 어린 시절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의 삶과 인간관계까지 끊임없이 흔드는 기억이 된다.




중년에 접어든 스티븐은 자신의 삶마저 흔들리기 시작하자 오랫동안 외면해온 아버지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일기장과 아버지가 남긴 편지와 메모를 읽고, 당시 아버지와 가까웠던 친구와 동료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아버지의 모습은 모두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다정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이다. 아버지를 알아갈수록 오히려 그는 더욱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변해간다.




스티븐은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사이의 간극에서 혼란을 느낀다. 한 사람의 삶은 결코 하나의 이야기만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구와 함께했는지, 어떤 순간을 바라보았는지에 따라 같은 사람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된다. 결국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조차 수많은 모습 가운데 일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부재는 스티븐의 현재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언젠가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은 채 살아간다. 동시에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고 떠나는 사람이 될까 두려워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갑자기 거리를 두고 관계에서 물러나려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평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와 어느새 비슷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과거의 상처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와 선택까지 끊임없이 흔드는 기억으로 남는다.



상상 속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얼마 후 나는 일어나서 복도를 지나 부모님 침실로 다가갔다. 문밖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거기에 있으니 행복했다는 것만은 안다.

나는 그렇게 방 바깥의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웃음소리를, 그들이 아직 그 안에 있다는 기색을, 한때 내가 알! 삶이 언젠가는 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조짐을 찾아 귀를 기울였다.

421쪽


제목인 <상상 속의 삶> 역시 이러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어린 스티븐은 사라진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삶을 상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조차 실제의 모습인지,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인지 확신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이 있으며, 기억 속의 사람과 실제의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후 한 달이 채 안 되어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식적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때를 끝으로 아버지가 실존한다는 증거―전화번호, 영구 거주지, 심지어 차에 대한 기록까지—는 전부 사라지지만, 당시 나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삶에서 어떤 것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는 것,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

396쪽


앤드루 포터의 문장은 큰 감정을 소리 높여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지나간 장면과 사소한 기억을 차분하게 꺼내놓으며 상실의 감정을 조금씩 쌓아간다. 절제된 문장 탓에 오히려 이야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무게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스티븐의 여정은 결국 모든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이 아니라, 끝내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가깝다.





아버지는 서재 책상 앞 벽에 프루스트의 다음 구절을 적은작은 쪽지를 우리에게 남겼다.

진정한 낙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이다.

나는 언제나 이 구절을 어머니와 나에게 남긴 사과라고, 자신이 우리를 저버렸음을 인정하는 글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것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남겼을 가능성도 있다. 

423쪽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은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더욱 오래 남는다. 지나간 시간은 기억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잃어버린 것은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기도 한다. 스티븐이 평생 붙들고 있던 아버지 역시 어쩌면 실제의 아버지인 동시에 그가 기억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아버지였을 것이다.




책은 사라진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이면서 결국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과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해도 삶은 계속된다. 지나간 사람과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품은 채 현재의 사람들에게로 걸어가는 것. 마지막에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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