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만날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이제는 한 권 한 권이 전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도 조금 천천히, 아껴 읽는 마음으로 읽었다.
오랫동안 읽어 온 작가인 만큼 그의 소설에서 반복되어 온 질문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피를 나누어야만 가족이 되는 걸까. 혈연으로 이어져 있어도 서로에게 가족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무런 혈연이 없어도 서로를 지키며 가족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꾸준히 이야기해 온 것도 결국 이러한 가족과 관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유카와의 가족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특히 친어머니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천재 물리학자나 사건 해결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유카와를 보여준다. 갈릴레오 시리즈가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유카와 마나부는 철저하게 사생활이 배제된 인물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채 과학적 논리로 불가능해 보이는 트릭을 풀어내는, 그야말로 차가운 지성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드러난 가족사는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시리즈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마련한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복선 회수의 쾌감보다는 "유카와에게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채 작가와 작별하게 되었다는 아쉬움도 함께 남았다. 다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지막 유작인 <영원의 기억>(국내 출간 예정)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작품에서 유카와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질지, <투명한 나선>에서 드러난 새로운 면모가 어떤 방식으로 되살아날지 기대하게 된다(사실, 이 내용이 나올지 확실하지는 않다).
사건은 지바현 앞바다에서 한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시신의 등에는 총상이 남아 있었고, 사법 해부 결과 타살 가능성이 분명해진다.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그를 실종 신고했던 동거 여성은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직장까지 휴직한 채 사라졌으니 자연스럽게 의심이 쏠리지만, 그녀에게는 범행이 불가능해 보이는 알리바이가 있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력자까지 등장하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수사가 난항을 겪는 가운데 경시청 수사1과의 형사 구사나기와 우쓰미는 사건을 추적하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과 마주한다. 바로 유카와 마나부다. 늘 그렇듯 구사나기의 수사 협조 요청을 단칼에 거절할 것 같았던 유카와는 이번만큼은 묘하게 다른 태도를 보인다. 수사에 협조하면서도 자신만의 목적이 있는 듯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우쓰미는 그런 유카와가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소설은 사건을 제시하고 수상한 인물을 배치한 뒤, 조금씩 단서를 쌓아가며 독자의 추리를 유도한다. 하지만 <투명한 나선>의 중심은 단순히 범인이 누구인지, 어떤 방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독자의 관심은 유카와가 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로 옮겨간다.
그런 점에서 "자네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라는 유카와의 말은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갈릴레오 시리즈를 읽어 온 독자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카와를 냉철한 물리학자이자 비논리적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천재, 경찰이 풀지 못하는 난제를 해결하는 탐정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고 무엇을 마음속에 묻어둔 채 살아왔는지는 거의 알지 못했다. <투명한 나선>은 사건 해결자라는 역할 뒤에 가려져 있던 인간 유카와를 비로소 꺼내 보여준다.
제목인 <투명한 나선>도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묘하게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사람들의 삶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사라진 듯했던 과거는 어느 순간 현재와 다시 겹쳐진다. 직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연과 비밀이 나선을 그리듯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맞닿는 것이다.
<투명한 나선>에는 이러한 이미지처럼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여러 겹으로 포개져 있다. 누가 누구의 친부모인지, 실제로 혈연으로 이어져 있는지, 그리고 피가 이어져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DNA는 혈연관계를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피가 이어져 있어도 가족이 되지 못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런 혈연이 없어도 서로를 지키고 보듬으며 가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부모,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성장한 아이, 그리고 뒤늦게 다시 만난 이들의 삶이 서로 포개지며 또 하나의 나선을 만들어낸다. 나선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다른 위치로 나아간다. 이처럼 삶은 이전과 똑같이 반복되지 않지만, 부모 세대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자식 세대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과거의 관계가 세대를 거쳐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며 이어지는 과정 역시 이러한 나선의 움직임과 닮아 있다.
그래서 강렬한 트릭이나 숨 가쁜 반전을 기대한다면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결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시리즈를 오래 읽어 온 독자에게는 이번 작품이 지닌 감정의 무게가 더욱 깊게 다가올 것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이 인간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유카와의 내면을 흔들었다면, <투명한 나선>은 유카와 자신의 삶과 과거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오며, 사건 해결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유카와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투명한 나선>이 보여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혈연 자체라기보다, 혈연과 기억, 그리고 선택이 세대를 거쳐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과학과 논리를 앞세워 온 갈릴레오 시리즈가 마침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묵직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