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펄사블님의 서재
  • 불가사의한 V양 사건
  • 버지니아 울프
  • 12,600원 (10%700)
  • 2024-08-16
  • : 2,065
언어에 대해 생각한다.
언어로 세워진 문명의 역사가 있고,
언어가 촘촘히 쌓아 낸, 그렇게 축적된 학문의 세계가 있다.
그림책이든, 아니 어떤 형태의 예술 작품이든, 호흡을 길게 두고 다가가야 한다.
책을 읽은 것은 어제였지만, 곧바로 이 그림책에 대한 감상을 어거지로 쥐어짜 언어화 시키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설거지를 하다 문득, 언어는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언어에 권력이 있음을 내가 잠깐 잊고 있었나.
입장도, 의견도, 감정도, 호소도, 그것을 특정 분야 혹은 언어권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언어화 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한다.
언어화를 한 것이 언어화를 하지 않은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더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긴다.
법의 언어, 공권력의 언어, 어른의 언어 ?
그러면 이 언어에 들어오지 못하는 건 무엇이 있을까.
치매가 있고 잘 안 들리시는 할머니가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하는 정제되지 않은듯한 말들 ?
긴 세월을 홧병을 앓은 중년, 노년 여성들이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칠 지언정,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공포에 떨 지언정, 그걸 재판과 법정이 수용하는 언어로 뱉지 못하는 것 ?
Speech disorder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언어,
농인들의 언어 ?
우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는 아가의 언어 ?
사회가 언어와 텍스트, 그리고 그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쌓은 지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는 언어는 열등한 것으로 격차를 두는 것.

서포터즈에 당첨되어 버지니아 울프의 초단편 소설과 고정순 작가님의 그림, 홍한별 번역가님의 번역이 탄생 시킨 '초단편그림소설' <불가사의한 V양 사건> 을 읽고, 뻔하지 않은 글을 남기고 싶다는 고집에 시간을 더 가지며 생각에 잠기다 보니,
글자가 아닌 이 그림책을 읽고 내가 느낀 "느낌"에 감각을 기울이게 된다.

글자와 언어를 쏟아내지 않으면 견뎌지지 않는 나인데, 물을 뿜어내는 호스가 천천히 사그라들듯 마치 잠든듯이 영혼이 고요해진 채, 헤아릴 수 없는 그림을 한 장 한 장 멍하니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 이게 그림책의 힘이구나.

책은
"이 이야기는 런던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로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건데 이 이야기는, 런던에서만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반드시 런던이어야만, 울프여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 울프만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기어코 시대와 국경을 넘어 이 시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여성들, 고정순 작가님과 홍한별 작가님, 그리고 이 작품에 고개를 끄덕일, 어느새 자신의 존재는 죽어버린 존재들과 연결된다.
죽음을 인간의 삶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건, 어떤 마침표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물할적인 것을 떠나, "죽었다 생각하고" "쥐죽은듯이" 라고 일상에서 쓰이는 표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많은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죽이며 산다는 것을. 그렇게 죽여야만 존재를 인정 받고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어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울프의 삶을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차갑게, 마치 이상한 무언가를 보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심정. 처절한 외로움, 물 속에 잠겼을 때 도리어 편안했을까, 주머니에 넣을 돌을 하나씩 골랐을까 아니면 한꺼번에 움켜쥐어 넣었을까 하는 물음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