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귀향길에 죽었고, 누군가는 집까지 돌아와 죽었으며, 오디세우스는 살아 있으면서도 돌아오지 못했다. 『오디세이아』는 바로 그 귀향의 이야기다.
『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의 인물과 사건을 이어받지만, 서사는 트로이아 전쟁 직후부터 시간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가 전우들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난 전쟁과 귀향의 흔적이 조금씩 드러난다.
초반에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없다. 무대는 그의 고향 이타케다. 트로이아 전쟁에서 누가 얼마나 큰 공을 세웠으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었느냐 같은 문제는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그 유명한 트로이아의 목마조차 회상이나 노래를 통해 부분적으로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숱한 병사들의 목숨값을 치르고 되찾은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와 아주 잘 살고 있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그들을 찾아왔을 때 헬레네는 오디세우스의 활약을 회상한다.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고 누더기를 걸쳐 노예처럼 변장한 채 트로이아 성안에 침투해 정보를 얻어 나왔고, 목마 속에서도 지략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전설처럼 활약상만 떠돌 뿐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집에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눌러앉아 있다.
그가 이타케를 떠날 때 아들 텔레마코스는 갓난아이였다.
살면서 늘 입을 조심해야 하는데, 트로이아 전쟁의 배경에는 오디세우스의 입이 한몫했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에는 직접 나오지 않지만, 다른 고대 그리스 신화 전승에는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그녀가 선택한 남편의 결혼을 함께 지켜주겠다고 맹세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폴로도로스의 『도서관』에는 이 맹세를 고안해낸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라고 나온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수많은 구혼자 때문에 골치를 앓던 헬레네의 아버지 틴다레오스에게, 자신이 페넬로페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해결책을 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 해결책이 바로 누구든 헬레네의 남편으로 선택되면 다른 구혼자들이 그 결혼을 함께 지켜주도록 맹세시키는 것이었다. 페넬로페를 얻으려고 고안했던 발상이 페넬로페와의 긴 이별의 서막이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사랑하는 페넬로페와 갓난아기를 두고 남의 애정 문제로 벌어진 전쟁터에 나가서 개죽음당하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상황을 호메로스의 원문에서는 아가멤논이 메넬라오스와 함께 이타케까지 찾아가 오디세우스를 트로이 원정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회상하는 장면으로 보여준다. 다른 신화 전승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디세우스가 미친 척하며 징집을 피하려 했다고 전한다.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끌려가기 싫어하는 설정 자체가 호메로스의 원전에 기초하고 있지만, 미친 척했다는 구체적인 일화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바깥의 이야기다.
영화의 기본적인 뼈대와 구성 방식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차용했지만 영화는 『오디세이아』 한 권에만 갇혀 있지 않다. 호메로스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던 전쟁 이전의 이야기와 다른 고전 전승들을 끌어와 하나의 오디세우스 이야기로 다시 구성한다. 놀란 역시 원작이 당대 청중의 기존 신화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관객에게는 더 많은 앞이야기와 배경 설명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트로이아 전쟁’의 전체 이야기는 사실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 어느 한 권에도 온전히 들어 있지 않다. 『오디세이아』에서도 트로이아의 목마와 함락 과정의 일부를 회상 형식으로 들려줄 뿐, 완전한 이야기로 서술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구전과 서사시와 비극이 오랜 시간 서로 겹쳐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의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가 된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파리스의 죽음, 헬레네 구혼자들의 맹세 같은 이야기도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바깥의 다른 전승을 통해 전해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여자 하나 때문에 그리스 전역에서 그렇게 많은 군대를 모을 수 있었으며, 남의 일에 그토록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을까. 명예라는 당대의 가치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가치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어떤 전쟁인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졌다 한들.
그런데 정작 오디세우스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어른이 되었다. 텔레마코스다. 왕이 집을 비운 지 오래되자 이타케의 유력자들은 페넬로페에게 구혼한답시고 집안에 몰려와 먹고 마시며 재산을 거덜낸다. 시아버지 라에르테스는 농장으로 물러나 있었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는 왕 없는 집을 지켜야 했다.
신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유사하다. 그러나 수많은 신들의 진흙탕 싸움이었던 『일리아스』와는 달리,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신은 아테나다.
아테나는 『일리아스』 때부터 오디세우스를 도왔고, 『오디세이아』에서도 그의 귀향과 텔레마코스의 여정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둘은 꽤 닮았다. 머리를 쓰고, 필요하면 속이고 변장하며 빠져나갈 길을 찾는 데 능하다. 어쩌면 아테나는 오디세우스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테나는 멘테스의 모습으로 변장해 텔레마코스를 찾아가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떠나라고 등을 떠민다. 놀란의 영화에서 젠데이아가 연기한, 오디세우스에게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아테나와는 다르다. 호메로스의 아테나는 실재하는 신으로서 오디세우스를 위해 사람의 모습을 바꿔가며 여기저기 나타나고, 그의 아들에게까지 손을 뻗는다.
그렇게 텔레마코스는 처음으로 이타케를 떠난다. 필로스에서 네스토르를 만나고, 스파르타에서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를 만난다.그의 행방은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회상, 그리고 메넬라오스가 프로테우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해진다.전쟁을 함께한 사람들의 소식도 듣는다. 아이아스는 신들의 도움 없이도 살아남았다고 자만했다가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죽었다. 아가멤논은 10년 전쟁을 살아남아 집까지 왔지만, 그의 귀환을 반기지 않았던 아내와 내연남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오디세우스는 아직 살아 있다.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등장한다. 귀향의 막바지에 이르러 배도 전우도 모두 잃은 채 오기기아섬에서 요정 칼립소에게 붙들려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는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바로 그 칼립소다. 여기서 감독은 원작과 달리 기억상실이라는 요소를 끌어들여, 오디세우스가 기억과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까지 귀향의 일부로 만든다.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칼립소는 그를 오기기아섬에 붙잡아두고, 자신과 함께 산다면 불멸의 삶까지 주겠다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날마다 바닷가에 앉아 고향을 그리워한다. 아름다운 칼립소와 낙원 같은 섬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 필멸의 인간으로 페넬로페와 함께 늙고 싶다. 그러나 배도 동료도 모두 잃은 그에게는 그 섬을 떠날 방법이 없다. 그렇게 7년을 보내고, 8년째가 되어서야 제우스의 개입으로 마침내 오기기아를 떠날 수 있게 된다.
칼립소를 벗어나 우여곡절 끝에 파이아케스인들의 땅에 도착하는데, 우리가 오디세우스의 모험이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는 사실 그가 파이아케스인들에게 들려주는 회고담이다. 놀란 영화도 원작의 이러한 비선형 구조를 적극 수용한다.
이때부터 진짜 모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에서도 압도적인 비주얼을 선보였던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이야기는 단연코 모험 중의 탑이다. 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거인에게 자기 이름을 ‘아무도 아니다’라고 속여 다른 퀴클롭스들의 도움을 피하고 탈출하지만, 안전해지자 굳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혀버리는 오두방정을 떨어 포세이돈의 저주를 자초한다.
그 뒤의 귀향길도 순탄할 리 없다. 외눈박이 아들을 눈멀게 한 오디세우스에게 복수하려는 포세이돈이 그의 귀향을 가로막는 반면, 바람을 다루는 아이올로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불리한 바람들을 자루 안에 넣어준다.
신들이 방해하지 않아도 인간끼리 귀향을 스스로 망치기도 한다. 놀란의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원작에서 오디세우스 일행은 외눈박이 거인에게서 살아남은 뒤 아이올로스를 만나 바람 자루를 받고, 그 덕분에 이타케가 눈앞에 보일 만큼 가까이까지 돌아온다. 그런데 이들을 끝내 이타케에 발 디디지 못하게 한 것은 인간의 시기와 질투였다. 왜 애초에 자루의 정체를 모두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스스로 자초한 표류에 밀려 도착한 곳은 점입가경이다. 라이스트뤼고네스인들이 사는 이곳은 아예 도시 전체가 식인 거인들의 사회다. 항구 안쪽에 정박한 배들은 이들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선원들은 꼬챙이에 물고기처럼 꿰여 잡아먹힌다.
그런데 경계심 때문이었는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오디세우스만 자신의 배를 항구 바깥쪽에 따로 정박시켜 놓았다. 덕분에 그의 배와 선원들만 간신히 빠져나온다. 그 많던 함대의 대부분과 수많은 부하를 한꺼번에 잃고, 이제 귀향길의 식구들도 단출해졌다.
키르케의 섬에서 인간이 돼지로 바뀌는 장면은 놀란의 영화와 원작의 디테일이 다르다. 호메로스의 원작은 약을 탄 음식을 먹은 동료들을 키르케가 지팡이로 돼지로 바꾼다. 영화에서는 인간들이 자기가 돼지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동안 키르케가 마구 주물러 돼지로 성형하는데 그 모습이 여간 끔찍하지 않다. 탐욕스런 인간의 본모습을 그대로 은유하는 놀란의 통찰이 놀랍다.
이 대목에서도 오디세우스는 돼지가 되지 않는다. 원전에서 주인공 예외의 법칙은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가 건네준 약초로 해결된다. 헤르메스를 삭제한 놀란의 영화에서도 오디세우스만 예외인 건 마찬가지다.
사실 오디세우스가 오매불망 아내만 생각하며 귀향만을 원하는 지고지순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은 놀란 감독이 생략한 키르케와의 1년에 숨어 있다. 원작의 키르케는 영화 속 음산한 마녀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신이다. 오디세우스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그곳에서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하며 1년을 보낸다. 전쟁의 기억도, 동료들을 잃은 데 대한 죄책감과 책임도, 귀향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도 모두 잊고 싶다. 그렇다고 마냥 그곳에 주저앉아 일평생 나른하게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귀향길을 먼저 재촉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부하들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죽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야 한다. 떠나고 싶다고 했더니 키르케는 그래? 좋아, 하며 쿨하게 보내준다. 몸까지 섞고 1년을 함께 지냈으면서도 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역시 신들이란.
오디세우스는 오케아노스의 끝, 안개와 어둠에 싸인 키메리아인들의 땅에서 제물을 바쳐 죽은 자들의 혼을 불러낸다.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기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맞닿는 곳에서 망자들을 만난 셈이다. 놀란의 영화에서도 오디세우스는 하데스가 아닌 황량한 검은 해변에서 죽은 자들을 만난다. 저승세계를 해변으로 대신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원작의 묘사에 가까운 장면이다. 그곳에서 오디세우스는 죽어서도 예언의 능력을 잃지 않은 테이레시아스를 만난다. 한때 거인의 눈을 멀게 했던 오디세우스가, 이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의 앞날을 묻는다. 어머니와 전우들을 비롯한 여러 죽은 사람들의 혼도 만난다. 스스로 긴 삶을 버리고 영원한 명성을 선택한 아킬레우스는 죽은 자들의 왕으로 군림하느니 차라리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팔이하며 살아 있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 고안된 명예라는 기만적인 단어가 얼마나 헛되고 무가치한 것인지, 죽어서야 깨달은 아킬레우스가 가장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다.
어쩌면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반전의 메시지를 죽은 아킬레우스를 통해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애정과 남의 명예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가 칼과 창에 찔려 잔인하게 희생된 수없이 많은 개죽음들. 그 개죽음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 자체가 『일리아스』가 자신이 노래하는 영웅주의를 스스로 비판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세이렌의 노래 장면이다. 놀란의 영화에서도 비교적 원작에 충실히 구현해 놓은 부분이다. 오디세우스는 노래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나 들으면 안 된다. 미래의 자신이 노래 소리에 홀려 귀향이고 뭐고 또 망쳐버린다는 걸 아는 오디세우스가 아직 듣지도 못한 노래 소리에 이미 홀려 자신의 귀만을 열어두고 홀로 돛대에 묶인다. 시키는 대로 밀랍으로 귀를 막은 선원들은 돛대에 묶여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홀려 풀어달라고 몸부림치는 오디세우스의 명령을 듣지 못한다. 오히려 미리 받은 명령대로 그를 더 단단히 묶는다.
세이렌의 유혹을 빠져나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제 윤리적 딜레마의 순간이다. 두 갈래 길이 있다. 한쪽으로 가면 모두 죽을 수 있다. 다른 한쪽으로 가면 여섯 명이 반드시 죽는다. 가능성으로서의 전멸과 확정된 여섯 명의 죽음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선택한 길에는 여섯 명의 확정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선원들은 모른다. 동료들의 목숨값을 치르고 얻은 생존이 배신처럼 남는 무거운 짐은 오롯이 오디세우스가 짊어지게 될 터이다. 영화에서는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선원들의 비난까지 보탠다.
헬리오스의 소 앞에서 그 여섯 명의 희생도 결국 허사가 된다. 키르케가 얼마나 강조했던가. 절대, 절대 태양신의 소를 건드리지 말라고. 먹다가 돼지로 변해버린 경험도 잊었는지 또다시 먹는 것 앞에서 이성을 잃는 우리의 조연들. 결국 이렇게 해서 ‘주인공만 살아남고 다 죽는다’ 법칙은 완성된다.
모두 잃었다. 열두 척의 배도, 수많은 부하도, 전리품도. 승리를 안고 트로이아를 떠날 때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이제 홀홀단신 몸 하나만 남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이야기의 처음에서 만났던 칼립소의 섬이다. 훗날 파이아케스인들에게 들려주던 긴 회고담은 칼립소의 섬에서 앞서 우리가 보았던 오디세우스의 현재와 접속한다.
항해에 능한 파이아케스인들은 그 긴 이야기를 들은 뒤,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실제로 끝내주는 마지막 운송자가 된다. 공주의 도움과 왕궁에서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 그는 잠든 새 이타케로 옮겨지며 마침내 귀향에 성공한다.
그렇게 쉽게.
잠든 사이에도 건너갈 수 있었던 그 바닷길을 무엇이 10년이나 가로막았을까. 신들의 장난? 자기 이름을 밝혀버린 실수? 바람 자루를 열어버린 부하들의 욕망? 키르케와의 나른한 1년? 아니면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조차 때때로 흐려졌던 것일까.
집에는 페넬로페와 결혼해 이타케의 왕이 되려는 적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누가 충성했고 누가 배신했는지도 알아야 한다. 신분을 숨긴 채 늙은 거지의 모습으로 집에 들어간다.
집에 돌아온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은 늙은 개다.
귀향이란 떠날 때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이미 변해버린 시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다. 모든 것은 변했다.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는 늙었고 아들은 다 자라 청년이 되었다.
낮에 짜고 밤에 푸는 페넬로페의 수의 속임수도 결국 들통난다. 마침내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활로 열두 개의 도끼 구멍을 통과시킨 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변장한 오디세우스뿐이다. 구혼자와 배신자들을 향한 살육이 벌어진다. 적들이 모두 죽었지만 귀향은 아직이다. 이제 아내에게 자기가 남편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트로이아 전쟁과 십 년의 모험담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세상이 아는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아는 오디세우스는 다르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 올리브나무 침대의 비밀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가장 확실한 표지가 된다.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버텨 돌아온 곳에는 영웅의 명예가 아니라 남은 생애 동안 살아내야 할 인간의 삶이 있었다. 트로이아의 영웅 오디세우스에서 페넬로페의 남편으로 돌아오는 거리. 부재 동안 아기에서 성인이 된 텔레마코스의 아버지로 돌아오는 거리. 그 거리가 이타케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멀었는지도 모른다.
바닷가에 앉아 고향을 바라던 남자. 낮에 짠 천을 밤마다 다시 풀며 20년을 버틴 여자. 거지로 변한 주인을 알아보고 죽는 늙은 개. 두 사람의 삶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올리브나무 침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곳.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