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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 17,100원 (10%↓950)
  • 2026-01-16
  • : 3,561



사랑이 아니라 존재였던 사람들


 


《폭풍의 언덕》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야기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 너무 격렬하고 잔인해서였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집착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깊으며, 운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는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서로 사랑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인의 사랑과는 조금 달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연인이라기보다, 서로를 자기 존재의 일부로 느끼는 사람들에 가까웠다.  캐시가 “나는 히스클리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과장된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그녀에게 히스클리프는 사랑하는 남자이기 전에 어린 시절의 자신이고, 함께 황야를 달리던 자유이며, 사회적 신분과 예절이 그녀를 길들이기 전의 본성이었다.


캐시는 정말 히스클리프를 배신했을까?


캐시는 에드거도 사랑했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방식과 달랐을 뿐이다. 에드거는 아름답고 다정하며 교양이 있었고, 캐시에게 안전하고 세련된 삶을 열어주었다. 몰락해가는 언쇼 집안에서 살아온 캐시에게 그의 청혼은 자신이 동경하던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었고, 거칠고 불안정한 현실에서 벗어날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에드거는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었고, 히스클리프는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존재였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했다면 행복했을까? 힌들리는 그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이 도망쳤다 한들 궁핍과 사회적 멸시 속에서 살며, 자책과 포기한 삶에 대한 아쉬움으로 사랑은 서서히 빛을 잃고, 초라하고 몰락한 두 개인이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캐시의 선택을 배신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당대의 관습과 제도 아래, 몰락해가는 집안의 캐시에게 남은 유일한 현실적 선택지였을 것이다.


캐시는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을까?

캐시는 에드거와 결혼하더라도 히스클리프와의 결속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드거의 재산과 지위로 히스클리프를 도울 수 있고, 에드거와의 결혼생활과 히스클리프와의 결속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캐시의 오만이자 절박한 바람이었다. 가당치 않은 생각이었다.


캐시에게 에드거와 히스클리프는 공존 가능한 서로 다른 세계다.에드거는 결혼과 생활의 세계고,

히스클리프는 존재와 기억의 세계다. 그러나 두 남자는 한 여자를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다.에드거에게 히스클리프는 아내의 마음을 차지한 남자고, 히스클리프에게 에드거는 캐시가 자신을 버리고 선택한 사람이었다. 캐시는 자기 안에서 형성된 두 세계의 분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시 찾아온 선택의 순간에도 캐시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신사로 변신한 히스클리프가 캐시의 안온한 일상을 깨고 돌아온 후에 말이다. 그 어떤 남편이 아내와 다른 남자의 이토록 깊은 결속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는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에드거의 요구는 타당했다.그러나 캐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히스클리프를 선택하면 에드거가 준 사랑과 안정, 집과 지위, 자신이 선택해 살아온 현실을 버려야 했다. 에드거를 선택하면 자기 영혼과도 같은 히스클리프를 버려야 했다. 캐시는 두 남자 사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신의 본질 사이에 서 있었다.


캐시는 선택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캐시가 죽은 이유는 안정과 본질, 두 세계 사이의 분열을 견딜 수 없어서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기 자신과도 같은 히스클리프.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서다. 병든 캐시가 어린 시절의 방과 황야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녀가 그리워한 것은 히스클리프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결혼하기 전의 자신, 사회적 선택을 하기 전의 자신, 황야의 바람 속에서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안주인도 아니었던 자신이었다.


그레인지의 방 안에서 캐시는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없는 삶 속에 갇혀 있었다. 히스클리프는 그녀에게 말한다.

자신이 캐시의 마음을 부순 것이 아니라, 캐시 스스로 자기 마음을 부쉈고,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까지 부쉈다고.

이 말은 비수처럼 캐시를 찌른다. 캐시가 감당해야 했던 현실과 그 선택에 내재한 불가능성을 보지 못한 비난이기도 하다. 캐시는 자신의 삶을 둘로 나누었고, 그 둘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실은 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히스클리프 역시 캐시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었다. 자비롭지도 성숙하지도 않았다. 그는 캐시 없이 살 수 없었지만, 캐시가 자신 없이 살아가는 것도 허락할 수 없었다. 정말 캐시의 행복을 자기 욕망보다 더 사랑했다면, 에드거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돌아왔다 하더라도 결혼을 존중하고 거리를 두었어야 했다.


히스클리프에게는 캐시의 평온보다 자신과의 결속을 확인받는 일이 중요했다.자신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필요했고, 자신을 멸시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그의 사랑은 절대적이지만 상대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캐시를 독립된 한 인간이라기보다 자기 존재의 일부로 붙잡는다.


캐시가 죽은 뒤에는 그 욕망이 더욱 적나라해진다. 편히 쉬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괴롭히고 미치게 하고, 귀신이 되어 따라다녀도 좋으니 떠나지만 말라고 외친다.사랑하는 사람의 평안을 바라기보다 자신의 고통 속에라도 계속 붙잡아두려 한다.캐시를 놓아주는 일은 그에게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배신이었다.


무슨 사랑이 이래?


캐시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고 믿으며 집과 황야의 모든 곳에서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놀라울 만큼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복수한다. 힌들리의 몰락을 이용해 워더링 하이츠를 차지하고, 아들 린튼과 캐시의 딸 캐서린을 도구로 삼아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까지 손에 넣는다.



복수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캐시가 죽은 뒤 히스클리프는 약 18년을 더 살았다. 그 시간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히스클리프가 돌아온 뒤 캐시가 죽기까지는 반년 남짓이다. 그마저 자유로운 연인으로 함께한 시간도 아니었다. 

에드거가 마지못해 허락한 방문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만났고, 마지막에야 병든 캐시와 단둘이 마주한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고, 잃어버린 뒤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었다. 


그 긴 18년 동안 히스클리프는 계획된 복수를 완결한다. 복수의 열매로 두 저택을 손에 넣은 지 몇 달 만에 그 역시 죽는다. 복수의 열매로 두 저택을 손에 넣은 지 몇 달 만에 그 역시 죽는다. 먹지 않고 잠들지 않으며 황야를 헤맨다. 

허공을 바라보고 웃으며 주변의 모든 것에서 캐시를 본다. 캐시가 죽은 날부터 이어져온 병적인 애도가 복수라는 마지막 목적이 사라지자 그를 완전히 삼킨 듯하다. 복수는 캐시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이유였다.

복수가 끝나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끝났다.


히스클리프는 대체 누구였을까?

이야기 전반에 걸쳐 히스클리프는 수수께끼이다. 애초에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인종적 배경을 지녔는지,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 뒤 어디에서 무엇을 해서 불과 몇 년 만에 그 큰돈을 벌었는지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군대, 식민지 무역이나 해운, 도박이나 사채 등을 추측하지만 소설은 아무것도 확인해주지 않는다. 


에밀리 브론테가 처했던 환경의 제약과 제한된 사회 경험이 남성들이 활동하던 외부 세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토지와 혼인, 상속과 가문의 몰락처럼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세계는 세밀하게 묘사했지만, 히스클리프가 바깥세상에서 어떻게 신사적 태도와 자본을 얻었는지는 통째로 비워두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공백이 히스클리프를 더 강력한 존재로 만든다. 그는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사회적 범주에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 특정 인종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계속 타자화된다. 제대로 된 성도 없고 혈통도 없으며 돈의 출처도 없다. 사회 밖에서 나타나 그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재산과 혈통의 질서를 모두 장악한 뒤, 다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처럼 사라진다.


우리가 본 캐시는 정말 캐시였을까?

넬리는 이 소설의 화자인 동시에 흥미로운 등장인물이다. 이야기 속에서 넬리는 언쇼 가문의 가정부이고 유모이지만, 일반적인 하녀와는 달리 비밀을 공유하고 고충을 상담하며 가족의 일에 깊이 개입한다. 이야기 밖에서 넬리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진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이야기는 대부분 넬리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우리가 보는 캐시는 넬리의 눈에 비친 캐시다. 아름답고 고혹적이며 생명력이 넘치지만 동시에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잔인한 여자다. 히스클리프 역시 넬리의 도덕관을 통과한다. 그의 사랑은 절대적이지만 병적이고, 그의 고통은 진실하지만 행동은 사악하다. 넬리의 판단에는 기독교적 윤리와 가정의 질서, 절제와 책임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들어 있다.


넬리를 화자로 대체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소설 속에서 거의 완전히 지우는 데 성공했다. 도덕적으로 변호하기 어려운 사랑, 폭력, 복수, 학대, 강제결혼과 재산 탈취에 대해 넬리가 작가를 대신해 그들의 비도덕성을 비난한다.


그렇다고 넬리가 작가의 최종 판단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도 아니다. 넬리 자신의 허점도 꾸준히 드러난다. 자신이 묘사하는 행동만 보아도 늘 현명하거나 선량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을 늦게 전하고, 사건을 방관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지나치게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은 계속 변호하고, 자신은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믿는다.


캐시와 히스클리프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았지만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행동은 정확히 관찰하지만 감정의 깊이에는 닿지 못한다. 그녀가 두 사람을 비난할수록 그 비난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


“나는 히스클리프다.”


캐시가 이렇게 말할 때, 넬리의 상식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히스클리프가 죽은 캐시에게 자신을 괴롭혀달라고 절규할 때도 마찬가지다. 넬리는 그것을 광기와 죄악이라고 부른다. 에밀리 브론테는 넬리 뒤에 숨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난은 넬리에게 맡겨두고, 작가 자신은 끝내 판결하지 않는다.



결국 양다리를 걸치고 싶었던 캐시는 어느 쪽도 붙잡지 못한 채 그대로 추락했다. 캐시가 인생 전부였던 히스클리프는 그것이 사라지자 사랑을 복수로 치환했다.


무슨 사랑이 이래,


** AI를 이용해 위의 내용을 시각화해 보았습니다. 초보라 미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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