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의 구멍, 나의 구멍은 무엇일까
CREBBP 2026/08/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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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의 구멍
- 현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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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 2023-03-22
: 380
『고고의 구멍』을 관통하는 가장 선명한 이미지는 제목 그대로 고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다. 처음에 이 구멍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상징처럼 보인다. 노노를 잃고, 자신이 살던 터전을 잃고, 혼자가 된 고고에게 구멍은 상실과 결핍, 그리고 공동체에서 밀려난 소외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고고의 여정을 ‘구멍을 메우는 과정’, 다시 말해 상실을 치유하고 완전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이 구멍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거부한다.
거인들의 땅에 이르렀을 때 구멍은 고고에게는 명백하게 존재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를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며 그의 생존을 돕지만, 정작 고고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구멍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실제 몸에 난 구멍이라기보다 기껏해야 ‘정신적인 구멍’으로 해석될 뿐이다.
이때 고고의 괴로움은 단순히 상처가 있다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내가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타인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커진다. 그래서 고고가 조바심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은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느끼는 분노와 닮아 있다. 아무리 친절한 타인이라도 나의 고통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친절에는 도달할 수 없는 벽이 남는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에게 가장 많은 것을 제공한 존재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고고의 가장 중요한 결핍 앞에서는 무력하다.
반대로 작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구멍은 더 이상 고고 혼자만의 이상 현상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구멍이 보이고, 공유될 수 있으며, 다른 존재와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금은 고고의 구멍을 실제로 메울 수 있다. 여기서 고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핍이 타인에게 이해되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했던 치유의 서사를 뒤집는다.
구멍이 메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상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깊게 연결됨으로써 타인의 감정과 경험이 고고에게 밀려들어온다. 완벽한 이해와 완벽한 공감은 오히려 자아의 경계를 위협한다. 고고가 원했던 것은 분명 구멍의 치유였지만, 막상 그것이 가능해졌을 때 그 치유는 또 다른 고통이 된다.
나는 이 대목이 『고고의 구멍』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우리는 흔히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의 반대편에 ‘완벽하게 이해받는 상태’를 놓는다. 그러나 현호정은 양쪽 모두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아무도 내 구멍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고립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구멍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압도된다.
그렇다고 고고가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 욕망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고는 구멍을 지닌 채 사는 법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동시에 그것이 쉽게 없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인물에 가깝다.
그래서 고고의 여정은 ‘구멍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기보다,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이 메워질 수 없거나, 메워진다 해도 또 다른 고통을 낳을 수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과정처럼 읽힌다.
노노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노노를 되찾으면 구멍도 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상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복구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노노새를 찾는다고 해서 구멍이 단순히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구멍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특정한 사건 때문에 생겨난 하나의 상처라기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결여에 가깝게 읽었다.
노노를 잃어서 생긴 구멍이기도 하지만 오직 노노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은 아니다. 고향을 잃어서 생긴 구멍이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채울 수도 없고, 완벽한 공감으로 채우려 하면 오히려 자신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이와 함께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 속 ‘몸’의 문제다. 『고고의 구멍』에서는 몸의 크기와 형태가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작동한다.
거인인 비비낙안에게는 하찮을 만큼 작은 음식 한 조각이 고고에게는 넘치는 식량이 된다. 처음에 고고는 비비낙안에게 먹고 입고 이동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지만,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작은 몸 자체가 오히려 생존에 유리한 조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은 사람 금과의 관계에서는 그 구조가 다시 뒤집힌다. 이번에는 고고가 금을 먹이고 보호하며 생존을 돕는다. 그러나 고고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구멍의 문제에서는 금이 우위를 갖는다. 금은 고고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고고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둘의 관계에는 일방적인 강자와 약자가 없다.
고고는 금을 살게 하고, 금은 고고의 구멍에 접근한다.
한쪽의 결핍이 다른 쪽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그 능력이 다시 상대에게 의존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에서 권력은 몸의 크기에 단순히 비례하지 않는다. 누구의 몸이 누구에게 필요한가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밤과 금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몸을 굽혀 사족보행을 하며 금을 등에 태우는 밤은 외형적으로는 낮은 자세를 취하지만 오히려 의기양양해진다. 낮아진 몸이 반드시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는다. 상대를 운반할 수 있는 몸, 먹일 수 있는 몸, 구멍을 볼 수 있는 몸처럼 각각의 몸이 가진 능력이 순간순간 관계의 권력을 재배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고의 구멍』에서 몸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다. 몸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방식 그 자체이다.
또 하나 내가 계속 의문을 품게 된 부분은 고고의 성별이다.
해설이나 작품 외부의 소개에서는 고고를 흔히 ‘소녀’라고 부른다. 그러나 적어도 소설 자체를 읽는 동안 나는 고고를 여성으로 확정할 만한 뚜렷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고고의 성별을 처음부터 소녀라고 규정하면 고고가 타인에게 느끼는 애착과 질투 역시 자연스럽게 연애의 언어로 번역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고고가 비비낙안이나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를 반드시 이성적 사랑이라고 읽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고고가 비비낙안과 비비유지의 키스를 목격하고 분노하는 장면 역시 꼭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긴 연애 감정’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고고가 자라온 쌍둥이 마을의 문화가 더 중요해 보인다.
고고가 알고 있던 세계에서는 존재들이 둘씩 짝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에 앞서 삶의 기본적인 형식이며 거의 자연법처럼 받아들여지는 질서다. 노노와 고고 역시 그런 한 쌍이었다.
그렇다면 노노를 잃은 뒤 고고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품게 되는 욕망은 반드시 연애적 욕망이라기보다 ‘누군가와 다시 배타적인 한 쌍이 되고 싶다’는 욕망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고가 이 오래된 관념에서 깔끔하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고고는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감정의 해소와 같지 않다. 금과 곰의 관계를 보는 일은 여전히 고고를 아프게 하고, 노노새와 커플새가 한 쌍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상처받는다.
고고는 밀접한 상대에게 자신 말고도 다른 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다.
이 점이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관계의 관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방식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몸에 밴 욕망과 상처까지 이성적으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고고는 ‘둘이 한 쌍’이라는 관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 채 계속 아파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관계에 대한 명쾌한 해답도 없다.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면 다른 관계를 배제하고 싶어지고, 그러나 상대는 나만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질투하고, 수용하면서도 상처받는다. 고고의 구멍이 끝내 완전히 메워지지 않는 것처럼, 이 관계의 모순 역시 끝까지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의 구멍』을 다 읽고 나면 처음의 질문 자체가 조금 달라진다.
고고의 구멍은 무엇으로 메워질 수 있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
우리에게 있는 구멍은 과연 완전히 메워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의 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구멍은 너무도 분명해서 나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이 아픈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명하려 애쓰고, 보아달라고 요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할 때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가 그 구멍을 너무 완벽하게 이해하고, 너무 깊이 들어온다면 그것 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타인의 감정과 상처가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서로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공감은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고고는 끝까지 구멍을 메우고 싶어한다.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
잃은 것을 되찾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면 비로소 이 구멍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구멍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멍이 없다고 가장하는 것도,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 안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때로는 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로도 그것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책을 덮고 나서 나는 결국 이런 질문으로 돌아왔다.
고고의 구멍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의 구멍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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