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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님의 서재
  •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머리나 밴줄렌
  • 16,200원 (10%900)
  • 2025-06-04
  • : 3,220

우리는 산만함을 좋지 않은 것이라고 배운다.

집중은 미덕이고, 산만함은 그 반대라는 말이다.

하지만 Marina Van Zuylen의 이 책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원제 : 『The Plenitude of Distraction』>는 이런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산만해도 괜찮다'는 말을 넘어, 산만함이야말로 깊은 사유와 창의적 발상의 출발점일 수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 은근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효율성과 결과 중심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늘 뭔가를 해내야 하고, 집중해야 하며, 성과를 내야 한다.

산만함은 이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장애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장애를 하나의 '틈'으로 보는 듯 하다.

그리고 이 틈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사유의 여백과 감정의 느슨함, 창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저자가 여러 고전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고민하고, 몽테뉴와 데이비드 흄을 통해 산만함에 대한 자신의 논지의 바탕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몽테뉴는 자신의 수상록에서 일정한 흐름 없이 주제를 넘나들고, 스스로의 생각을 끊임없이 뒤집는다.

집중 대신, 그는 산만함의 형식을 글쓰기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저자는 이 점을 짚으며, 산만함이 단지 주의력 결핍이 아니라, 자기 반성적 사유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흄 또한 ‘자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상과 감각의 다발로 보았고, 인간의 사고는 감정과 연상작용에 의해 산만하게 흘러간다고 보았다.

집중이 아니라 흐름과 연상, 이것이 사고의 진짜 모습이라는 점에서, 흄의 철학은 저자의 주장과 절묘하게 닿아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녀가 산만함을 '만족 지연'과 연결시키는 대목이다.

현대의 주의력 위기 담론은 산만함을 즉각적인 자극 추구와 동일시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산만함이 만족을 미루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지 않고 머뭇거릴 수 있는 힘, 결론을 유보하고 다른 길로 새는 용기, 바로 그 유예의 순간이야말로 창의성과 사유의 가능성을 여는 문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창작 과정에서 겪는 ‘막힘’이나 ‘돌아섬’이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무의식적 사유가 작동하는 창조의 배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저자가 무조건적인 산만함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산만함은 깊은 사유와 연결된 지연의 미학이지, 아무 데로나 튀는 집중력 저하 상태가 아니다.

그녀는 산만함이 “escape”가 아니라 “delay”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더 오래 숙성시키기 위해 걸음을 늦추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결론으로 독자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책 자체가 산만함의 형식을 닮았다.

서술은 유려하지만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다양한 철학자와 문학가의 사유를 참조하면서 지적 유영을 유도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한 부분을 읽고 나서 다음 장을 넘길 때 뜬금없는 사진들을 보며 딴 생각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이런 것도 저자가 의도했던 바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산만한’ 독서 경험이 이 책의 주제를 더 깊게 체험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유익한 산만함'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더불어, 이 책과 저자의 주장들은 산만함에 대한 죄책감을 거두어낸다.

오히려 그 산만함을 인간다운 사고의 조건으로 보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번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꼭 실패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같다.

어쩌면 그때가, 새로운 사유가 싹트는 순간일지도 모르니까.

우리의 사고방식을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연하고 복잡하며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되지만, 지금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유익한 산만함'이라는 독특한 경험은 우리를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분명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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