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더 아름다운 이야기
우리가 서로를 열면
너는 너를 내게 그리고 나를 네게.
우리가 깊이 빠져들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우리가 사라지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그러면
나는 나
그리고 너는 너.
-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꽤 오랫동안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읽더라도 앞 부분만 읽거나, 부분부분 읽거나, 읽고 싶은 부분만 읽었던 것 같다. 좀처럼 집중 하기가 어려웠달까. 주변에서는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는 진단도 내렸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안드레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가 참 잘 읽혔다. 작품 속에 나오는 '나'는 작가의 자전소설이자 그 시절의 방황과 혼재된 어려움을 '나'와 칼라지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잘 그려낸다. 1977년의 케임브리지에서 두 사람은 한 곳에 머물렀지만 거울처럼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한 사람은 아랍인이인 동시에 택시 운전사였고, 한 사람은 유대인이자 하버드 대학원생이었다. 처지는 같을 수 없지만 시스템 안에 겉돌던 두 사람이 카페 '알제'에서 우정을 쌓는다. 그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고, 다다다다다 하며 확신에 찬 말을 뱉는 그를 좋아한다.
타지에 온 사람들만이 갖는 고향에 대한 향수병과 같은 삶이, 가난과 자신들 앞에 닥친 차가운 눈길과 관계가 힘겹게 다가온다. 소소한 행복이라고는 싸구려 커피와 술을 나눠마시고, 수영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이 동할 때면 여자들과 만나 온기를 나누다가 다시 자기만의 울타리로 돌아가 문을 꽁꽁 잠근다.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썰물처럼 주인공인 '나'는 칼라지와 같은 함께 왈자패처럼 어울리다가 이내 다시 자신이 속한 대학원생으로 돌아가 그만의 시간을 누린다.
같으면서도 아니고,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칼라지의 체크 택시에 눈을 돌린다. 혹은 그를 찾거나 밀어내거나. 이미 한 남자의 사춘기라고 하기에는 그는 자아가 형성되었으나 미래가 내다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간 속에서 그는 '칼라지와의 관계'를 조각조각내어 그와 만난다. 호탕아같은 그와 소심하지만 생각이 많았던 한 젊은이와의 관계는 그렇게 봄이 되어 싹이 텄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관계의 끝을 고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을 읽어주는 남자>가 생각났다. 한 때 사랑했지만 함께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것이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기에는 주인공인 '나'는 참 매몰차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는 찌질했고, 그러다 다시 온기가 필요하면 다른 이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그는 성장한다. 책은 훗날 그가 아들을 데리고 와 하버드 캠퍼스 투어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무엇도 남지 않는 시절을 그는 떠올린다. 그가 떠나고, 그도 떠난 시절의 봉함된 그 이야기를. 아들은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때 만났던 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머물렀지만 활성화되지 못한 그의 현재의 상태를 '나'는 노란 택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 그 시절로 나를 환기 시킨다. 부정하다가도 돌고 도는 도돌이표처럼 그를 떠올리는 그의 이야기가 에필로그를 다 읽었음에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향수와 그리움. 그리고 애증의 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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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한, 케임브리지에 와서 몇 년을 살았음에도 이곳에, 이 행성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걸까.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과연 여기 시스템에 들어 있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때 이곳에 속해 있었지만, 이곳이 정말 내 집이었을까? 아니면 이곳에 속해 있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는데도, 이곳이 내 집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은 이 두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었다. -p.20
그날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 로웰 기숙사인지 칼라지 옆인지 잘 모르겠다면,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둘 사이를 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집을 가졌지만 이곳에 소속된 적 없는 것처럼, 두 곳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 p.245~246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유령을 갖고 있다. 나는 처음으로 칼라지의 유형을 보고 있었다. 그건 그가 고함을 질러 그 유령을 쫒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p.270
우리 각자가 마치 달처럼 수많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p.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