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의 正道
책을 읽다보면 각각의 때가 있나보다. 어느 날은 페이지 한 장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그 힘겹던 책이 무던하게 잘 읽힐 때가 있다. 하무로 린의 <저녁매미 일기>는 나에게 그런 소설이다. 읽고 싶어 책을 펼쳤음에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다가 갑자기 말을 탄듯 훨훨 잘 넘어가는 책이었다. 요즘 다시 전집을 읽고자 펼친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분인지 일본 소설이 잘 읽힌다.
<저녁매미 일기>는 한 무사의 正道에 관한 이야기다. 주군의 부인을 탐했다는 이유로 슈코쿠는 10년 후에 할복 할 것을 명 받고 무카이야마 촌에 유폐된다. 쇼자부로는 어느 날 집무실에서 일하던 중 쇼자부로의 붓에서 먹물이 튀겨 옆자리에 앉은 신고의 얼굴에 묻어버렸다. 보는 즉시 미안하다고 하면 되었을 일을 그는 신고의 얼굴을 보고 웃어버렸다. 마음이 상한 그는 화를 냈고, 이내 싸움으로 번진다. 두 사람이 싸우던 도중 그의 칼날이 신고에 발을 베어 버려 그는 절뚝 거리게 만들어 버렸다.
다이묘의 으뜸 가신인 나카네 헤이에몬의 조카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헤이에몬의 명을 받고 무카이야마 촌으로 내려가 슈코쿠를 만난다. 당시 그는 주군 가문의 가보를 작성하고 있었다. 가보 편찬에 열을 올린 6대 번주 가네미치는 자신의 측실과 사통했다는 이유를 가진 슈코쿠에게 10년의 유예기간을 준다. 가보편찬이 중단되지 않기 위해 그에게 가보편찬을 계속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후 그는 유폐된 곳에서 주군 가문의 가보를 쓰는 일을 계속 하며 시간을 보낸다. 쇼자부로가 헤이에몬 명을 받고 슈코쿠에게 남은 3년동안 그가 도망을 가면 그를 즉시 없애라는 명령과 함께 그가 하는 작업에 대해 자세히 알리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간다.
감시자의 역할로 간 그. 쇼자부로가 내려간 시점만 해도 그는 무사로서 칼과 기술을 쓰는 것은 날렵했지만 무사로서 살아가는 마음은 단단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는 사내였다. 무사의 마음이라던가, 자긍심, 신념이 없던 이였다. 그런 그가 이제 3년 밖에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슈코쿠와 함께 살면서 '그날'의 일을 밝혀 그의 목숨을 구명하려고 한다. 그날에 얽힌 주군의 측실이었다가 절에 들어간 오요시도 만난다. 다방면으로 그가 할복을 하지 않도록 힘쓰지만 당사자인 슈코쿠만은 그저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 할 뿐이다. 그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쇼자부로는 마을 사람들과 얽히게도 된다. 슈코쿠의 아들인 이쿠타로와 그의 친구 겐키치의 이야기가 슈코쿠의 이야기와 함께 하나의 변수로 작용한다.
책은 할복을 앞둔 무사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양파처럼 드러내지 못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일이 공교롭게도 슈코쿠가 관리의 자리에 물러난 '그날'과 맞물려있다. 자신의 가문에 대한 가보를 쓰는 것에 가장 적합한 이를 택한 동시에 한 사람의 의심의 씨앗이 한 무사를 시간의 굴레에 묶어 놓았다. 그는 관리로서 출중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이였다. 농사의 풍년과 흉년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봉기에 대해 다독거릴 뿐 아니라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의 이익과 이치를 아는 관리는 많지 않았으며 오는 이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 마치 한 놈만 나와봐 하는 식으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되어 슈코쿠의 안전을 위협한다.
곧고 곧는 마음으로는 슈코쿠와 아들의 친우인 켄키치가 그와 같은 결을 함께 한다. 돌을 던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수면을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이가 있다. 여름 한 철 살아가는 매미처럼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무겁고 어려운지 아는 동시에 자신에게 유리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패를 자신에게 쓰지 않았다. 무사의 신념으로, 한 가문의 역사를 엮는 이에게는 그런 것이 해가 되므로. 모래시계는 자꾸만 뒤돌려 놓아도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 나가듯 빠져 나간다. 그 사이 그들에게 닥친 또 하나의 사건이 그를 결국 조이고 만다.
밝히고 싶지 않는 비밀이, 한 사람의 의심으로, 또다른 사람의 시기로 그의 삶은 여러 번 장면장면이 바뀐다. 너무나 곧아서 바른 길로만 가면 창창했을 한 사람의 길이 여러사람의 눈길로 그를 헤쳤다. 그럼에도 각오를 한 일에 물러섬이 없었던 그의 일은 탁월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감히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는 그의 신념으로 지켜나가는 것을. 마을에서 불미스럽게도 한 아이가 죽고 그것을 복수하기 위해 나아간 이가 던질 돌은 또 사람의 욕심과 시기와 먼 훗날의 약속을 기하며 끝을 맺는다. 일본 역사에 대해 깊이 알았더라면 더 의미를 생각하며 <저녁매미 일기>를 읽었을 것 같다. 역사가 갖는 내재적 의미와 무사의 신념, 할복이라는 무사의 철칙과 같은 마음이 느껴지면서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합니다. 오십 년 뒤, 백년 뒤에는 수명이 다하지요. 나는 그 기한이 삼 년 뒤로 정해진 것일 뿐. 하면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 p.27
"어찌하여 저녁매미입니까?"
쇼자부로가 의아해하자, 슈코쿠는 빙긋 웃었다.
"여름이 오면 이 부근에서 저녁매미가 많이 웁니다. 특히 가을기운이 완연해지는 여름이 끝나는 것을 슬퍼하는 울음소리로 들리지요. 나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몸으로 '하루살이'의 뜻을 담아 이름을 지었습니다." - p.30
부모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자식을 지키고 자식의 무사를 빌어준다. 자식은 그런 마음에 힘입어 자라는 것이다. - p.37
"가보를 만든다는 것은 본래 그같은 일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일도, 불리한 일도 모두 기록해 자자손손 전해야 비로소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 p.46
"허나 시대가 바뀌면 원리도 바뀔지 모르는 일. 바로 그러하기에 이처럼 과거의 사적을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이야.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후세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말이지." - p.53~54
"준케이인 님은 명군이셨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최선을 다해 섬겼지. 의심은 의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겨나는 법. 변명한들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네. 마음은 마음으로만 바꿀 수 있는 것이야." - p.135
사람은 마음이 정하는 곳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이 향하는 곳에 뜻이 있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렵지 않다. -p.305~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