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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숨은 다락방
  • 지상의 노래
  • 이승우
  • 12,600원 (10%700)
  • 2020-05-19
  • : 1,369

전조의 시작


 이승우 작가의 작품은 기독교의 색채를 많이 띄고 있다. 처음 읽었던 <생의 이면>(2013,문이당)과 <에리직톤의 초상>(2015,예담) 역시 그랬다. 그의 작품에는 웅숭한 깊은 골짜기처럼 드러나지 않는 어둠의 결계들이 존재한다. 소설 속 인물이 밖에서 살든 밖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깊이 숨어 살든 그들의 과거 속에서는 깊은 욕망의 덩어리들이 숨어져 있다. 과거의 한 자락이 어딘가 베어져 나오면 어떻할까 싶을 정도로 꽁꽁 묶인 덩어리 속의 실타래를 풀어보면 누군가의 진한 욕망이 숨어져 있다.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욕망과 방종이 훗날 누군가의 삶에 심한 생채기를 낸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가. 누군가에게 손이 닿지 않아 오랫동안 보존해 올 수 있었던 천산 수도원의 벽서는 우연한 경로를 통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이어진다. 후와 사촌인 연희, 박 중위가 관계된 이야기가 있다면 한 갈래의 이야기는 뜻밖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 정치가의 발자국이 찍혀져 있다. 역사의 한 획을 그었고, 공과 과가 분명히 드러난 인물이었다. 그는 장군으로서 그를 옆에서 보필했고, 함께 나아갔다. 가장으로서의 일보다는 밖에서의 일을 더 중시하면서. 독실하게 누군가에게 기도를 하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위험을 말하지만 당시에는 부인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대표되는 인물이 후와 한정효다. 많은 곁가지들이 있지만 그들은 어떠한 일로 하여금 세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새 같은 수도원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과거의 행적이 사뭇 다르지만 그들의 욕망이 행동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있을 곳을 찾아 그곳으로 향했고, 누군가는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그냥 놔둘 수 없어 무력으로 감금한 곳이 천산 수도원이었다. 그 누구도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입소였다. 천산수도원의 모습은 자발적인 성소였다가 때때로 누군가에 의해 감옥으로 탈바꿈 되기도 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이야기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마치 오래 전 사람들이 행했던 많은 일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거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관계 속에서 드러낼 수 없어 바라보았던 사랑과 욕망이 더해져 계략적으로 다가왔던 사랑, 보호해야 하지만 자신의 욕심으로 방조하고 방임했던 한 남자의 모습까지도 성경 속에 담겨져 있었다. 그들의 욕망이 더해져 한 여자는 몸과 마음이 평생 고통을 받으며 자신이 자라왔던 곳을 떠나 살아간다.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는 부메랑이 되어 상해를 입거나 상황적인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박 중위의 탐욕스런 구애가 사촌 누나인 연희와 멀어지게 했다는 사실에 그는 날카로운 칼날을 들게 한다. 결국 위해를 가하고 그는 아버지에 의해 천산수도원에서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한다. 몇 년의 시간을 함께하다보니 그 생활이 눈에 익었다. 시간이 지나 산에 내려온 그는 이제 아무도 없어 무작정 미용사 일을 하는 연희만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배우게 된 미용사의 길이 또다른 욕망과 폭력으로 점철된다. 마치 시계바퀴가 돌아가듯 그들이 갖는 욕망과 폭력이 대본에 나와있는 듯 맞물려 들어가 있다. 후는 우여곡절 끝에 사촌누나를 만난다. 그러나 연희는 후를 만남으로서 다시 폭력이 자행되고, 자신이 덫에 걸린 그 순간의 악몽으로 기억을 가져다 놓는다. 순수한 열망을 가졌던 소년은 많은 것을 겪으며 그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연희의 모든 것을 알아 낸 후는 정처없이 순례길을 떠돈다. 마치 세상의 부랑아처럼. 그리고 또다른 한 남자 역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산수도원에서의 고행을 하고 순례를 돌며 후와 마주친다. 사이사이 성경의 일화가 그들의 이야기에 파고든다. 거울과 같은 삶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동아줄처럼 성경의 이야기를 찾는다. 모든 것들을 씻겨 내 주듯이. 위에 언급했던 두 작품 보다 훨씬 더 깊게 기독교적 색채가 두드러진다. 종교적인 색채가 뚜렷한 책은 기피하곤 했는데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는 계속해서 파고 드는 질문의 질문들이 더 깊은 심연 속으로 파고들게 만든다. 그래서 종교적인 것 이상으로 그들이 행하고자 했던 일들이 더 비밀스럽게 묻혀 있는 것 같았고, 비로소 세상에 나왔을 때 거룩하게 느껴졌다. 침잠하고 조용한 요새와 같은 높은 산자락의 수도원이 겪은 비탄하고도 놀라운 고행의 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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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우연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 p.9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거룩함에 흠집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에 후광을 만든다. 실은 거룩함에 후광을 더하기 위해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거룩한 것들은 아름다움 때문에 더욱 거룩해진다. - p.28


모든 이해가 행동을 수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행동이 이해를 동력으로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 p.98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조절할 수 없다.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사랑의 본질이다. - p.125


되풀이를 통해 습관이 만들어지면 의식이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근육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일이 가능해진다. 익숙해진 어떤 움직임은 어떻게든 물론 왜인지도 묻지 않고 저절로 이뤄진다. 알아서 그 길로 가고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제물로 그 일을 한다.(생략)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린 후에 남는 생의 공허를 어쩔 것인가. 평생을 들여서 해치워 버린 후에 남는 생의 공허를 어쩔 것인가.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은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한다.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삶 때문이다. 일을 위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일이 있어야 한다.-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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