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고 나무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리처드 파워스의 장편소설 <오버스토리>는 나무와 사람의 이야기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인물은 제각각의 사연으로 나무 그리고 숲과 연결된다.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터득하는 아홉 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큰 숲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느슨하고도 끈끈한 ‘나무’의 연대
소설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인물, 니컬러스, 미미, 에덤, 레이와 도러시, 더글러스, 닐리, 페트리샤, 올리비아는 각자 다른 사연으로 나무와 연결된다.
이들 중 몇은 대륙의 얼마 안 남은 원시림을 구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 오랜 세월 서 있던 나무를 베려는 정부와 기업에 대항하는 운동의 현장에서 니컬러스와 올리비아, 미미와 더글러스, 에덤은 각각 파수꾼, 메이든헤어(은행나무), 더그전나무, 뽕나무, 단풍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나무 이름을 지닌 이들은 연대의 힘으로 나무를 지킨다. 서로 팔을 결박해 둥그런 바리게이트를 만들어 나무를 보호하기도 하고, 나무와 몸을 연결해 벌목을 막는다. 파수꾼과 메이든헤어는 커다란 나무 위에서 1년쯤 머물며 나무를 지킨다. 두 사람은, 세상을 굽어볼 수 있을 만큼 높은 나무 위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들의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들의 깨달음은 소설 전체에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무엇을 소유할 수 있고 누가 소유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권리를 부여하고 왜 전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그걸 가져야 할까? -351p
한편, 불륜으로 불화를 겪는 부부 레이와 도러시, 게임 개발자 닐리는, 나무 이름을 지닌 인물들보다는 느슨한 형태로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가운데 모든 인물을 더 큰 이야기속에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인물은 페트리샤다. 청각 장애를 지닌 페트리샤는 어린 시절부터 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관련 연구를 지속해 책을 펴낸다.
당신과 당신의 뒤뜰에 있는 나무는 공통 조상에서 나왔다. 15억 년 전에 당신들 둘은 서로 나뉘었다. 하지만 지금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엄청난 여행을 했지만, 나무와 당신은 여전히 유전자의 4분의 1을 공유하고 있다……. -190p, 페트리샤 웨스터퍼드의 책 <비밀의 숲> 중에서
<오버스토리>의 등장인물 모두는 페트리샤의 책을 읽고 느슨하면서도 끈끈한 ‘나무의 연대’에 참여하게 된다. 인물들은 나무와 일체화를 이루어가며 나무와 인간이 같은 뿌리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이는 등장인물들에게 하나의 위로가 된다. “식물이 뭘 하는지를 볼 수 있다면, 우린 결코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나무의 시선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오버스토리>는 아홉 인물의 ‘지금의’ 승리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니컬러스와 올리비아, 미미와 더글러스, 에덤은 숲을 벌목해 만드는 리조트 공사 현장에 불을 지른다. 그 과정에서 올리비아가 목숨을 잃고 나머지 네 명은 각자 도피해 흩어져 삶을 지속한다.
나무를 사이에 두고 끈끈했던 이들이 반목을 겪기도 한다. 훗날 사법당국에 붙잡힌 더글러스는 에덤을 지목하고 형을 감량받으며 사랑하는 미미가 잡히지 않도록 돕는다. 에덤은 70년씩 연이은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에덤은 이를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의 시간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짧은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버스토리>에서 인간의 시간은 현재형으로 서술되며 몇 세대에 걸친 이야기가 짧게 압축되기도 한다. 나무가 이어온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인간 사이의 갈등은 작고 사소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다사다난한 아홉 인물의 삶은 나무들 사이에서 위로받는다. 결국, 인물들은 나무와의 연대를 지속해나간다.
이것.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것. 우리가 얻어야만 하는 것. 이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예요. - 702p
<오버스토리>를 읽는 내내 거대한 숲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숲 속을 거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온갖 나무에 대한 묘사를 따라가다 보니 책을 읽는 속도가 더뎠고 때로는 읽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이것이 바로 <오버스토리>가 지닌 매력이며, 느린 흐름이 이 소설의 내용에 딱 맞는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무의 느리고 긴 시간과 비교한다면 언제나 소설의, 인간의 시간은 빠르고 짧을 수밖에 없으니까.
소설은 한 인물에 침잠하는 이야기라고 여겨왔던 생각이 <오버스토리>로 인해 완전히 바뀌었다. <오버스토리>는 끝을 향해 갈수록 인물을 ‘인류’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인류와 자연을, 나무의 시간으로 느리게 조망하며 알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오버스토리>가 삶에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은, 주변의 나무와 숲이 더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배경에 불과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하나의 ‘존재’가 되어 곁에 머무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위로가 필요할 때 나무를 찾게 될 것 같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오버스토리>를 읽은 직후, 집 주변 숲의 나무들을 베어 근린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그 공사 현장에 주의 깊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오래도록 생각했다. 나무를 베어 공원을 조성하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언젠가 바쁜 일상에 치여 나무의 세계를 잊게 된다면 그때 다시 <오버스토리>를 꺼내 읽을 것이다. 나무와 숲에 대한 배경지식을 좀 더 갖춘 채로 이야기에 완전히 녹아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