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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양심
  • 물질과 기억
  • 앙리 베르그손
  • 25,650원 (5%1,350)
  • 2005-09-20
  • : 2,869

지각·기억·신체의 관계 구조


문제 설정: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넘어

물질과 기억은 앙리 베르그손의 핵심 저작으로, 전통적인 심신이원론(정신 vs 물질)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그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처럼 정신과 신체를 별개의 실체로 보지도 않고, 단순한 유물론처럼 정신을 뇌의 산물로 환원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미지(image)”라는 중간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 전체를 이미지들의 총체로 파악한다. 여기서 신체 역시 하나의 이미지이며, 특수한 기능—즉 행동을 위한 선택과 지연—을 수행하는 중심으로 정의된다. 이 책의 핵심 질문은 “지각은 어떻게 형성되며,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행동에 개입하는가”이다. 결국 그는 의식, 기억, 신체를 하나의 작동 체계로 이해하면서 ‘지속’이라는 시간 개념을 그 기저에 둔다.


1. 지각은 ‘선택된 이미지’다

제1장 「표상을 위한 이미지들의 선택」은 이 책 전체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부정한다. 외부 세계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의 지각은 그 전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유용한 일부만을 선별하는 과정이다.


핵심은 신체의 역할이다. 신체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행동의 중심(center of action)”이다. 외부 자극이 들어오면 신체는 그에 대해 즉각 반응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택을 수행한다. 이 ‘지연’이 바로 의식과 지각의 발생 조건이다. 즉, 지각은 외부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라 행동 가능성에 따라 필터링된 결과다.


예컨대 동일한 풍경을 보더라도 화가, 군인, 건축가는 서로 다른 것을 지각한다. 이는 감각기관의 차이가 아니라 행동 목적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지각은 객관적 재현이 아니라 실천적 선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뇌의 기능도 재해석된다. 뇌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관이 아니라, 외부 이미지들 중에서 행동에 적합한 것들을 조정하고 차단하는 장치다. 


이 장의 중요한 전복은 다음과 같다:

• 지각은 ‘제하기’(reduction)다. 즉 전체 세계에서 일부만 남긴다.
• 신체는 ‘중계기’가 아니라 ‘선택기’다
• 의식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에서 발생한다.


결국 제1장은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 잘라낸 세계”라는 급진적 인식을 제시한다.


2. 기억 이론: 순수기억과 습관기억의 이중 구조

제2장과 제3장에서는 기억이 본격적으로 분석된다. 베르그손은 기억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습관기억으로, 이는 반복을 통해 신체에 각인된 자동적 반응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나 글쓰기 같은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순수기억으로, 과거의 경험이 시간 속에 보존된 채 의식 속에서 소환되는 형태다.


중요한 점은 순수기억이 뇌에 저장된 것이 아니라, ‘지속’ 속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기억은 물질적 저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심층에 보존된다. 뇌는 단지 그것을 현재 행동에 맞게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기억은 과거의 복제가 아니라, 현재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시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는 물리적 단위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 속에 스며드는 질적 지속이다. 이 지속 속에서 기억은 현재를 두텁게 만들며,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을 확장한다.


결론: 지각-기억-행동의 통합적 구조

제4장과 결론에서 베르그손은 지각과 기억의 관계를 통합한다. 지각은 현재의 행동을 위한 선택이고,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개입시키는 힘이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 순수 지각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며, 실제 지각은 항상 기억과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인간의 의식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 외부 세계: 이미지들의 총체
•신체: 행동을 위한 선택 장치
• 지각: 현재를 위한 축소된 이미지
• 기억: 과거를 현재에 투입하는 힘


이 구조 속에서 정신과 물질의 대립은 해소된다. 정신은 물질과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선택과 기억의 운동이다. 『물질과 기억』은 이를 통해 심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며, 특히 “의식은 행동을 위한 장치”라는 실천적 철학을 제시한다. 


[덧]

1. 이 책은 딱 읽을 만하게 번역돼 있다. 정말 집중해서 읽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중간 중간 비문이 섞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양호한 번역이다. 좋은 번역은 절대 아니고, 지금 번역된 <물질과 기억> 중 유일한 선택지이기에 그걸 감안하면 괜찮은 정도. 칸딘스키의 <점선면>에 비하면 양반이다.

2. 본 책을 9번 읽고 나름 정리한 내용이라 이 리뷰를 통해 <물질과 기억>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3. 제1장은 10번도 더 읽었다. 매우 난해하고 이미지를 접근하는 방식이 일반 상식과는 완전히 달라 이해하기가 매우 버겁다. 그래도 10번 이상 읽으니 베르그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것 같아 정리할 수 있었다. 10여년 전에 이 책이 토론 주제도서였는데 참가자들이 어렵다고 난리였다. 자기 평생 이렇게 어려운 책은 처음본다고. 나름 독서가에서 선수들이었는데 말이다. 여튼 최고난도 책 탑3에 포함되는 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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