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에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일종의 유목민, 즉 ‘노마드’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이민가서 오래 살다 보면 그 2세, 3세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잃어버리고 완전히 미국인으로 동화된다. 그런 와중에 어떤 계기로 자신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라 이해했다.
이런 것은 참 많이도 봤을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많은 아이들이 외국으로 입양되어 갔다.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고 유럽이나 미주로 입양 가서 장성한 후에 자신의 뿌리를 찾는 프로그램 말이다. 외국에서 의도치 않게 이민이나 입양으로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나는 ‘디아스포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돌베게, 2023/2006 재판)을 읽고 이와 같은 인식이 완전히 깨졌다. 이 책의 부제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명확히 한다. 제일조선인(일본에서 외국인)으로서의 이산(離散;떼어놓아 흩뜨리다)이 그 의미의 핵심이다. 누군가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강제로 추방당하여 타지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자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기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 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p13)
구한말 일본의 간섭으로 살기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한 사람들보다(마지못한 자발적 이주), 이들이 그곳에서 정착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하여 낯선 곳에서 살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 재일조선인도 그들과 같은 부류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자아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이들은 모국어와 모어 사이에서 갈등하며 내적 존재의 비애를 짊어지고 있다. 재일조선인 2세로서 서경식의 고뇌는 ‘재일조선인’이 아니면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재일조선인을 ‘이해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해의 바탕에는 공감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나는 재일조선인의 아픔이 무엇인지 도저히 가늠하지 못 하겠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이 생겼다.
이것은 순전히 이 책의 힘이다. 저자는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해외로 나갔다. 재일조선인이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기약 없는 탈출이다. 여권도 없고 그냥 귀국 허가증만 받고 해외로 나가는 거다. 해외에서 그 어떤 기본적인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사고가 나더라도 여권이 없기에 이 사람을 책임져줄 국가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재일조선인의 국적은 한국이다. 하지만 한국은 재일조선인의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 이 말할 수 없이 답답한 모순. 재일조선인과 국적의 문제는 아주 오래 묻어둔 한일 관계의 풀지 못한 숙제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그 어느 정권도 재일조선인 국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재일조선인 비극은 천황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는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만들었으니 일본이 해결해야 하는데 일본은 이 문제를 그냥 무시했다. 그래서 재일조선인은 모두 하루 아침에 외국인이 됐다. 세금을 내도 일본에서 그 어떤 해택도 받지 못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존재들. 국적은 한국인데 말이다.
그래서 서경식은 끊임없이 해외로 나간다. 아주 불안한 여행이지만 해외로의 여행은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종의 수단이다. 해외에서 자신과 비슷한 디아스포라 사람들을 만나 자신과 동질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그는 해외에서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
그의 책들 대부분은 예술 견문 기행록이다. <디아스포라 기행>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의 순서대로 쓴 기행문이 아니라 여러 기고문에 실었던 순간순간 여행기들을 모아 책으로 묶은 게 본 책이다. 그래서 체계성은 없다. 그럼에도 기행문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의 예술 기행은 디아스포라적 삶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하나의 방편이다.
프리모 레비, 시린 네시트, 후지이 노부르(문승근), 자리나 빔지, 장 아메리, 펠릭스 누스바움,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 첼란 등 본 책에 실린 예술가들의 그림과 글 등은 디아스포라적인 삶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됐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지표이다. 특히 책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데이비드 강의 <입을 위한 선>은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처절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해외 작품들을 보고 감상하면서 서경식은 자신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전 지구적인 디아스포라적 삶으로 확장한다. 세계의 디아스포라 예술이 서경식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디아스포라라는 존재의 모습이 근대 특유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p15)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조선인) 디아스포라는 600만 명 정도 된다니,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서경식을 포함해서 이들이 바라는 바는 아마도 ‘존재의 특이성’이 아니라 평범하게 대접받는 것일 게다. 일반적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받는 기본적 인권의 존중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서경식은 국민국가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의 일련의 저작들은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서경식이 생각하기에 이를 위한 매체가 예술의 언어이고 이를 통해서 그는 소극적이지만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여기 실린 예술 작품들을 보면 디아스포라적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한편 본 책은 일반적인 기행문이 아니다. 기행문은 보고 들은 바를 토대로 견문을 넓히는 것이지만, <디아스포라 기행>은 저자의 자유롭고자 하는 바람들의 총체, 즉 그가 지향하는 미술품들의 목록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작가가 발굴한 디아스포라 예술 작품의 큐레이션 쯤 된다. 예술 작품 위주로 봐도 된다는 말씀.
본 책에는 행위예술, 설치 미술, 조각, 회화 등 여러 미술 작품이 등장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자면 문승근의 <활자구>(p131)와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p177)이다. 특히 후자는 누스바움이 죽었기에 그의 마지막 자화상이 되었다. 어둡고 황량한 밀폐된 공간을 통해 옴짝달싹 못하는 자아의 상태를 담담히 그린 작품. 쉽게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문승근, <활자구>

펠릭스 누스바움,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
물론 글과 작품을 통해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국민국가를 넘어서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디아스포라적 삶은 소박한 이상이라 생각한다. 현실은 아직 국민국가가 건재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 근대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만이 근대를 종결시키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작일 것이다. (끝)
[덧]
1.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여행기를 모은 편집본) 특이한 기행문 형식이 됐다.
2. “디아스포라야 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 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p.16)”이라고도 했는데 너무 이상적인 주장인 듯. 디아스포라적인 삶은 지극히 불안정한 삶인데 정치적 연대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물론 예술로는 연대가 가능할 것이다.
3.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을 같이 읽으면 금상첨화 일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