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작인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타임 셸터>를 읽었다. 처음 읽는 불가리아 소설. 불가리아 국민작가라는데, 이런 작가가 있었는지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번역되어 나오는 세계문학 전집에 불가리아 작가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으니까. 다소 의외인 건 문학동네에서 자기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펴낸 게 아니라는 거. 왜 그런지 좀처럼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름도 모르는 작가의 신간을 사서 읽는 건 모험에 가까운데, 일단 알라딘 문학 리뷰의 대가이신 뽈 님이 본 소설에 무려 별을 5개 줬기에 어느 정도 믿음은 있었다. 근데 사실 처음 신선함은 좋았지만, 20여 페이지를 지나 70쪽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 작품을 계속 읽어야할지 아니면 던질지 기로에 섰었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치매 치료로 이어지기에, 언젠가 읽었던 메디컬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신선했는데, 갑자기 알츠하미머 치료에 대한 이야기라니, 흥미도가 급격히 떨어진 게 사실. 그래서 70쪽에서 고민에 빠졌던 거. 가독성은 좋아서 속는 셈 치고 계속 읽기로 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의 분신과 같은 가우스틴은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가는 알츠하이며 환자들을 위해 옛 시대를 완벽히 재현한 클리닉을 고안한다. 영원한 과거의 노스텔지어의 공간인 ‘타임 셸터’를 구축하려는 그의 욕망은 점차 세계로 확대되고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70쪽을 넘자마자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지면서 탄력이 붙었다. 그러다가 3장 ‘본보기로 선택된 나라’에 이르러서 약간 루즈해 졌다. 3장을 읽어내는 데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4장을 빠르게 지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작가의 필력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타고도 남을 만했다. 플롯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대가의 아우라가 느껴졌다랄까.
기억 재현 클리닉을 국가로 확대하고 각 국가가 국민투표를 통해 자국의 시대를 택한다는 방식은 기상천외했다. 유럽의 역사와 국제정세를 알지 못하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 구조다. 책 후반부에 작가의 유럽 지도 삽화가 있는데, 각 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회귀 연도를 국민투표로 채택해 나타낸 지도. 매우 신선했다. 각 나라가 지향하는 과거의 향수가 있었고, 이는 각 나라의 국제정세와 역사에 해박하지 않으면 설정할 수 없는 내러티브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회귀 국민투표가 실시된다면 언제가 될까 생각해 보았다. 1988년? 1994년? 2002년?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기억의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히 베르그손의 저작을 읽었던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기억은 수직의 원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에 수록된 기억의 원뿔 모형]
베르그손의 주저 <물질과 기억>에 보면, 어떤 특정한 기억은 수직의 원뿔 구조 속에서 아래 위를 오르내리며 현재에 개입한다고 한다. 원뿔의 밑층에 잠재해 있는 기억은 현재에 촉발된 상황으로 인해 현재로 즉시 소환되어 현재의 이미지를 구축한다고. 게오르기는 이 기억의 층을 건물 구조로 구체화시켜 보여준다. 클리닉에서 60년대는 2층이고 40년대는 지하다. 각 층은 닫혀진 게 아니라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이고, 장치들(잡지나 음반)은 과거가 현재에 개입할 수 있도록 중요한 트리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영원한 과거의 노스텔지어 공간인 ‘타임 셸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늙어감’이 아닐까. 아무리 과거를 재현하여 없어지는 기억을 붙잡는다고 해도 인생은 결국 고립되어 죽어간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끔찍한 고립이 찾아오고 있어, 분명해.”(p307) 그래서 이 한 문장의 울림은 컸다.
“나는 결말을 좋아한 적이 없다. 결말이 기억나는 책이나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 (중략) 나는 오로지 시작만을 기억한다. (중략) 내가 지금 얼굴을 바짝 갖다댄 채 바라보고 있는 장미를 기억한다. 나는 장미 덤불과 키가 똑같다. 어느 전쟁에서 접은 외투를 입고 참호 속에 앉아 짧고 매운 담배를 피우는 나를 기억한다. 나는 52번가의 허름한 술집에서 불확실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앉아 있다.”(p448)
그렇다. “나는 이 기억 말고 다른 인생이 없다.” 각자의 고립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지만 저 먼 과거의 존재는 현재의 사람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두려움.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이를 담담하게 전한다. 그렇기에 더욱 비애감이 크다.
인생(과 시간)이란 얼마나 도둑 같은가, 어? 얼마나 강도 같은가….. 평화로운 카라반을 매복 공격하는 악랄한 노상강도보다 더 악랄하다. 그런 노상강도들은 돈 가방과 숨겨둔 황금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유순하여 실랑이 없이 재물을 내놓으면 다른 것-목숨, 기억, 심장, 생기-은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나 시간이라는 이 강도는 어느덧 다가와 모든 것-기억, 심장, 청력, 생기-을 앗아간다. 심지어 고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손에 넣는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그 와중에 당신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가슴을 축 늘어지게 하고, 엉덩이엔 뼈만 남게 하고, 허리를 굽게 하고, 머리칼을 성긴 백발로 변하게 하고, 귀에서 털이 자라게 하고, 온몸에 점을 뿌려놓고, 손과 얼굴에 검버섯을 돋게 하고, 앞뒤 안 맞는 말을 지껄이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고, 모든 말을 빼앗아 아둔하고 망령 든 사람이 되게 한다. 그 개자식은-인생, 시간, 노년 다 똑같다, 똑 같은 쓰레기, 똑 같은 깡패다. 그 개자식은 처음에는 적어도 공손해지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솜씨 좋은 소매치기처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도둑질하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작은 것들을 훔쳐간다-단추 한 개, 양말 한 짝, 가슴 왼쪽 윗부분의 미세하게 찌릿한 통증, 몇 밀리미터쯤 두꺼워진 안경, 앨범 속 사진 세 장, 얼굴들,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pp169-170)
덧
이 소설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의 불가리아 버전처럼 생각된다. 사람의 나이듦을 막을 수 없고, 시간이라는 존재에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