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략적인 한국 ‘현대미술사’에 대한 책을 읽었다. 보통 미술사를 소개하는 책들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예술 사조의 변천사, 다른 하나는 작가별 통사. 후자가 미술사를 스케치하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한계는 뚜렷하다. 어느 작가를 선별하더라도 항상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기에.
‘왜 하필 그 작가인가?’ 작은 물음이 아니다. 시대사를 정리하다 보면 아주 소수의 몇 명으로 추려진단다. 내 얘기가 아니라 영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허버트 리드가 한 말이다. 중요한 건 이 작가들이 평론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 의해 선별된 작가들이라는 거.
이 기시감. 즉 역사는 그것을 서술하는 주체의 시각이 절대적이라는 거. 역사는 역사가들에 의해 선택된 사건만 역사서에 담긴다는 사실. ‘왜 이 사건은 중요한데 잊혀진거지?’ ‘일상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등과 같은 비판이 제기된다. (그래서 미시사(微時史)라는 분야가 생겨났는지도)
하지만 미술사를 작가별로 스케치한다고 할 때 이 비판은 좀처럼 피해갈 수 없다. 왜 그따위로 작가를 선별하여 미술사를 구성했느냐(왜 이 작가는 빠졌냐)는 타박. 특히 한국 미술사, 그것도 현대미술사를 정리하여 개론적으로 보여준다고 선정한 작가라면 이 비판의 십자포화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현대미술이라는 분야가 그 역사가 일천하기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를 선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도 1977년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100인의 리스트가 있고, 2009년에 한국미술평론가 협회에서 발간한 한국 현대미술가 100인의 리스트가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미술가의 범위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얼추 1910년~1990년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범위라 생각한다. 그래서 위 두 리스트에서 함께 다루어진 작가라면 충분히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현대미술을 스케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최근에 읽은 <커튼콜 현대미술>(은행나무, 2019)은 현대미술 사학자 정하윤이 집필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스케치이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 30인을 다루었다. 여기 수록된 작가 대부분은 이미 일부 평론가가 출간한 작가론 저작에 포함된 작가들이다. (중복된 작가가 꽤 된다.)
하지만 미술사가가 집필한 책이 개인 선호도에 치우치고 객관적 평론이 아닌 인상비평으로 흐른다면 그 책에 대해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커튼콜 현대미술>은 미술사가의 작가론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은 입문서이지만 엄연히 작가론에 해당한다.)
정하윤은 한국현대미술의 시대를 4분 한다. 20세기 초, 해방 직후, 1970년대, 1980년대 이후로. 그리고 각 시대에 대응하는 작가들을 7인~8인으로 선별하여 대략 6-12페이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다. 대표작인 도판을 제외하면 평론은 대략 A4 1장~2장 사이 분량이다.
문제는 정하윤이 작가와 그림을 분석하는 태도에 있다. 그림에 대한 추측성 인상비평이 많다. 첫 장부터 나오는데, 고희동의 자화상을 분석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그림에 대한 분석적 비평이 아니라 추측성 서술은(p17)은 비평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이런 추측성 서술과 인상비평은 책 도처에 있다.)
더군다나 개인의 선호는 어찌나 그렇게 심하게 반영하는지 모르겠다. 이승택을 다룬 부분을 보면, 정말 미술사가가 작가를 이런 식으로 평해도 되는지 고소를 금치 못한다. “이승택의 작품은 짱이다!,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할 생각을!!, 작품을 보면 넋을 잃을 정도다.”(pp177-178) 읽어 보시라. 저자의 두 페이지를 압축한 글이니.
이런 인상비평은 책 전반에 걸쳐 있다. 논증이 필요 없는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동기를 평한 부분을 보자.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는 어떤가요? 아톰과 미키마우스는 각각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이지만, ‘아토마우스’는 이동기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형상입니다.” (p.223)
이동기 작가의 작품을 ‘팝 아트라 단정하지 말라’는 소제목하에 ‘예술=창조’라는 말로 아토마우스를 평가하고 있다.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가 이동기 작가가 예술적으로 창작한 작품이란 것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런데 ‘팝 아트라 단정하지 말라’니. 아토마우스 캐릭터를 보면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캐릭터와 본질적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겠다. 형상이 다를 뿐이지 전형적인 팝 아트다. 저자가 팝 아트라고 단정하지 말라는 논거가 ‘창조’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동기가 작품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게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그 자체에 있는 거고 그게 바로 팝 아트의 중심이자 작품 창작 활동의 근거다. 레퍼런스가 아닌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변형이나 합성 또는 패러디가 불가피하다. 그게 창작 활동 본질이기에 저자의 논거는 하나마나 한 소리다.
이러한 저자의 논조는 책 초반 김관호를 논한 부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저자는 작품 창조를 뭔가 처음 고안한(예컨대 절대주의 창시자 말레비치) 것뿐만 아니라 그걸 수용한 작품도 아류가 아닌 ‘창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창작이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레퍼런스가 아닌 창작물이 되기 위해서는 원작을 변형한 나만의 방식이 있어야 한다. 그게 선배 작가 A와 B를 믹스한다 든지, 아니면 내게 영향을 미친 작가 그림을 내식으로 변형하는 게 창작 활동의 근본이다. 내식으로 변형이 없으면 그건 레퍼런스일 뿐이다.
하지만 이건 그 계열의 일부 작품일 뿐이다. 진정한 회화의 창작물(=창조)은 독창성에 있고, 이건 그 사조를 연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달려있다. 절대주의에서 말레비치, 팝 아트에서 앤디 워홀 정도가 아니면 미술에서 ‘창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창작 활동’과 ‘창조’를 혼동하는 듯.
그런데 서세옥은 논한 부분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저자는 확실히 작품의 ‘창조’가 뭔지 알고 있다.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라는 개념만 존재하던 1959년에, 몇 개의 점을 찍어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p113)
이 대목을 보면 작품의 창조가 뭔지 대번 알 수 있다. 전통과 규칙을 넘어선 실험 정신에 입각한 이전에 없던 형상의 창작.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창조’의 본질일 거다. 그래서 서세옥을 본질에 집중한 화가라고 저자가 평한 거. 이런 것이 창작 활동으로서의 창조물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a와 b를 조합하여 그 장점만을 형상화한 작품이 창조가 아님은 당연하다. 한 사조라는 계열에 포섭되는 따라지 작품이다. 물론 작가의 창작품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동기의 아토마우스가 창조물이라는 건 저자의 서세옥 논의를 따를 때 결코 ‘창조’라 할 수 없을 거다. 저자는 이런 이율배반적 논의를 반성적 사유 없이 작품 분석에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책의 4부에 민중미술에 대한 소개도 나온다. 저자는 오윤과 신학철을 선정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미술은 엘리트 미술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고 말하면서(이 부분이 저자가 민중미술을 보는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 오윤과 신학철의 말을 언급하고 있다.
“오윤은 추상미술은 엘리트 미술이라고 비판합니다. (중략)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미술이 중요하고, 단색화와 같은 추상미술은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pp198-199) “신학철은 민중이 주가 되는 미술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할 수 있다.”(p204)
저자는 민중미술을 통해 엘리트 미술을 극복할 수 있고 민중이 주가 되는 미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민중’이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따라 이 미술 분야는 사장될 수도 있고 재평가가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민중’의 범주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도외시한 채 엘리트 미술의 대안으로 민중미술의 의의를 얘기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민중가요와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분야다. 당시 민주화 물결에서 미술도 예외가 될 수 없기에 시대상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미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대학교 주변의 가투가 없어진 걸 보면 민중미술도 한 시기의 유행이었던 거다. 물론 민중가요는 노동쟁의 때 종종 들리지만, 민중미술을 하고있는 작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시대가 변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80년대 민중은 독재에 눌려 지내던 국민을 부르던 일종의 ‘구호’였다. 시대가 만들어낸 대중의 다른 표현이다. 이걸 2020년대로 끌어와 엘리트 미술을 극복할 미술 분야로 상정한 것 자체가 무리수. 예나 지금이나 미술은 엘리트 미술이고 대중과 유리되어 온 게 미술사였다.
단순히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난해한 현대미술’ 보다 중요하다는 식으로 민중미술을 접근하면 민중미술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시대성을 희석시키게 된다. 또한 민중미술을 우리의 주체성 있는 미술로 자리매김하기에는 그 연속성의 한계가 뚜렷하다.
민중미술을 다루려면 시대의 한계와 그 특수성을 감안하여 ‘민중’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시도해야 그나마 이 분야가 나아갈 방향을 확보할 수 있는데, 저자는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자는 우리 미술의 주체성 확보를 위해 민중미술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식인데, 너무 소박한 인식인 듯하다.
객관성이 부족한 30인의 인상비평을 보니, 저자가 시대성을 대표한다고 본 작가가 결국에는 저자의 관심 작가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작가론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는 건 앞에서도 밝혔지만, 정작 박생광, 박고석, 권진규, 권옥연, 변종하, 이숙자, 이왈종 등이 빠져 있어 작가의 선택에 있어 아쉬움이 많다.
지금까지 책에 대한 불만만 얘기한 거 같아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책이다. 한국 미술 초보자에게 작가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림을 보고 대하는 감상 포인트는 유용하니까. 더군다나 대표작 74점의 도판은 확실한 장점이지 않을까. 여튼 한국 현대미술 입문자에겐 좋은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