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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여기에
기싸움
대굴대굴  2026/09/15 09:19

오, 덥다. 습도는 어제보다 덜하지만 뜨거움은 오늘이 더 심하다. 요즘 산길은 강아지풀 기세가 등등하다. 부숭부숭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길 양옆에 도열한 채 들썩들썩한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때마침 힙합이라도 흘러나오면 건들건들 리듬을 타는 힙합 소년들처럼 보인다. 귀엽구나. 그래, 강아지풀은 귀엽기라도 하지. 이름 모를 수많은 수풀은 여름을 등에 업고 내 어깨높이까지 자라서 맞짱을 뜨려 한다. 어이, 아저씨, 어딜 지나가려고? 이봐, 아저씨, 여기 지나가려거든 날 밟고 가야 할 걸? 길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한 풀을 피해 다리를 높이 드는데 메뚜깃과 곤충 한 마리가 내 손을 징검다리 삼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건너간다. 실례. 엉겁결에 발판 신세가 된 억울함에 버럭 화를 내본다. 이 자슥이!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이번엔 갑자기 등장한 참새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날아간 것도 아니고 내 앞길을 막고 총총 뛰어서. 마지막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본 거 같다. 실례. 느닷없는 등장에 소스라쳐 놀랐다가 욱해서 외친다. 아니, 이것들이!


집에서 고양이한테 무시당하니 이젠 산에 와서도 온갖 무시를 당한다며, 근거 없는 불만을 가득 품고 산에 오른다. 바위 무더기들을 낑낑거리며 오르다 잠시 쉬는데 말벌 한 마리가 주위를 빙빙 돈다. 피하는 게 상책이다. 조금 더 위에 올라가서 쉬자. 하지만 벌이 쫓아왔다. 아, 좀 쉬자고! 에잇, 더러워서. 간다, 가! 천년만년 여기서 썩을 때까지 잘 살아라! 무병장수하란 덕담을 퍼붓고 악에 받쳐 꼭대기에 도달하자, 성벽 구멍에 앉아서 이쪽을 살피던 모지리가 툭 튀어나와 내 쪽으로 온다. 모지리, 네가 웬일이냐?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 헤벌쭉. 불만 같은 거, 악 같은 거 금방 잊는다. 남자는 나이 들면 애가 된다던데. 갈수록 단순해지는 거 같다는 생각을 얼른 성벽 너머로 날려버린다.


닭가슴살과 간식 먹고 배부른 고양이와 단순명료해진 아저씨가 산 정상에 함께 있다. 모지리는 식곤증으로 나른해져 성벽 구멍에서 잘 채비하고, 아저씨는 그 구멍들을 통해 불어 들어오는 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몸을 돌려가며 땀을 식히는데 바싹 시든 나뭇잎 하나가 공중에서 바람개비처럼 돌며 부유하는 게 보인다. 휙휙휙. 완벽한 회전이다. 한들한들. 흠잡을 데 없는 가벼움이다. 사뿐.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착지다. 10점! 무언가 이룬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게 여유였던가? 착잡함이 한여름 태풍처럼 짧고 강하게 할퀴고 지나간다. 모지리와 눈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돌린다.


하산하는 길. 부쩍 늘어난 잠자리 중 한 마리가 길 앞을 막아선다. 왜? 왜 쳐다보는데? 한참을 눈싸움 벌이다 잠자리가 날아간다. 나도 모르게 곤충과 눈싸움하고 나서 순간 뻘쭘해져 한 소리 한다. 저 자슥이! 눈알 많다고 자랑하냐! 좋겠다, 눈깔 많아서! 마음의 여유는 무언가 이루는 것과 상관없는 모양이다.


꼬리말) 8월 26일에 썼던 글. 지금은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는 중. 웃자란 풀들도 다 잘라내고 가지치기한 탓에 건들거리던 강아지풀은 어느 순간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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