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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여기에

신의 은총만을 바라던 시대는 지났다. 지극히 불손하고 신성모독에 준하는 발언 같지만, 인간의 이해타산은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사람에게 겸손함보다 오만함을 부여했고, 그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 자들조차 인간을 알게 모르게 생태계의 최상단에 놓았다. '만물의 영장.' 요즘은 이런 표현 잘 안 쓰지만 한때 기고만장함의 극치를 달리던 사람들이 두루 썼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을 밑으로 끄집어 내렸다. 바벨탑을 쌓는 건 시대착오적이니, 필요할 때만 찾던 평등을 내세워 신을 인간의 영역으로 강등시킨 셈이다. 그러니 자리를 바꾼 신도 이제 책임을 져야 했다. 세상이 힘들고 불평등하며 부조리할 때 당신이 만든 세상이니 당신도 책임을 지라고, 뭐라도 말을 해보라고 사람들은 요구했다. 신은 응답했을까?


호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어디선가 현재 인류의 과제는 “인간 이외 존재들을 윤리의 영역에 재배치하고 인간을 생태의 영역에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썼다. - 배리 로페즈 <호라이즌>, P453, 454


요즘 세상은 자유와 권리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춘 문명이라 그럴 것이다. 개인을 억압하고 짓누르면 그 집합체인 사회도 억압하고 짓누르는 꼴이 될 터이니 모든 것의 기반인 개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 개인이 모두가 똑같을 리 없다. 우린 보편적 개인을 상정하고 그에 맞춰 어떤 원리를 적용하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쪽에 자리한 평등과 의무 또는 책임을 위한 무게추를 고려하지 않으면 저울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질 게 뻔하다. 결국 개인은 ‘나’만 존재하고, 공동체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진작에 그런 상태였을 지도 모르겠다.


신은 사람들의 줄기찬 질문과 힐난에 답했을까? 아마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외쳤을 것이다. 자유와 권리만큼,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염치는 있을 만큼만 평등과 책임을 생각해 보라고. 제발 좀 귀를 열라고. 우린 언젠가부터 원하는 답만 듣는 재주를 부린다. 그래서 우린, 너희들 꼬락서니부터 살피라는 신의 비꼼도 안중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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