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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여기에
까무룩
대굴대굴  2026/07/16 07:36

갑자기 까무룩 가라앉는다. 조금 전 축구 경기를 볼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축구는 우리나라가 이겼다. 그것도 역전승. 응원을 너무 열심히 했나? 아닌데. 중간에 세탁이 다 돼서 빨래도 널었고, 배고파서 떡도 데워 먹었는데. 떡을 너무 많이 먹었나? 음, 그럴 수도. 그래도 이렇게 의욕이 사라져서 껍데기만 남은 거 같은 느낌은 좀 지나치잖아! 경기 보기 전에 청소를 너무 열심히 했나? 항상 하는 건데. 어제 잠을 푹 못 잤나? 항상 그렇듯이 고양이가 두어 번 깨운 거 말곤 똑같았는데. 어제 산꼭대기에 갔다가 전운이 감도는 고양이 마을을 봐서 그런가? 그래, 그럴 수도. 리듬이 깨져서 그런가? 다른 날 같으면 고양이랑 놀다가 점심 먹고 글을 썼을 텐데. 그 모든 걸 축구 경기 보는 걸로 퉁 쳤으니. 내 성격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요즘 종종 이러는데 본격적인 갱년기인가? 이런, 그럴 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래도 머릿속으로 온갖 잡생각이 지나가는 걸 보니 뇌는 멀쩡한가 본데.


바닥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는데 고양이가 터덜터덜 내 앞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간다. 무심코 따라 들어갔는데, 방석에 턱 하니 자리 잡더니 나를 쳐다본다. 이것은? 이럴 땐 잠이나 자자는 고양이식 처방. 에라, 모르겠다.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처음 눈을 떴을 땐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두 번째 눈을 떴을 땐 배를 까고 자고 있었다. 아, 배 만져 보고 싶은데. 그럼 물겠지? 다시 까무룩.


정신을 차려보니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지났다. 내 기척에 고양이도 일어나 하품하며 기지개를 켠다. 나도 뻣뻣한 목을 돌리며 하품. 사람 하나와 고양이 하나가 아니라 마치 고양이 둘인 찰나의 시간대가 지나갔다. 글을 쓴다. 글을 써 보지만 아직 고양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웅, 귀찮아라.


(꼬리말) 월드컵 체코전이 있을 때 썼던 글이다. 글에 묻은 귀찮음이 그대로 글의 성격이 되었는지 한 달이 넘어서야 세상에 등장하고 말았다. 이름은 신중하게 잘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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