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어느덧 여기에

소비의 시대다. 내 부모님 세대는 살기 위해서 소비했다. 먹거리를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소비는 곧 생존이었다. 그 자식 세대에게 소비는 사치이자 여유였다. 아등바등 먹고 살지만 그래도 좀 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이 합리적 소비란 모순적인 단어 조합으로 이어지고, 현재 30대부터는 소비가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살기 위해 소비하는 게 아닌,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벌고 살아가는, 어찌 보면 내 부모 세대보다 더 전투적인 삶의 방식. 소비하지 않으면 내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시대다.


물건만 소비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비 대상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게다가 빠르고 압축된 세상의 흐름은 그 모든 소비를 짧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긴다. SNS의 사진들, 짧은 영상들, 썸네일을 통해 지식, 정보, 역사 등이 그 무겁고 가벼움을 떠나 몽땅 찰나의 순간에 액기스처럼 짓뭉개진다. 사람들은 원래 선배들(거인들)의 어깨를 밟고 서서 세상을 변화시켰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건 불안함과 안정감, 둘 모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팔랑팔랑. 순간에 압축된 강렬함은 휘발성마저 강해서 밟고 설 어깨조차 없는 듯하다. 공중에 나부끼는 비닐봉지처럼 안정감도, 불안함조차도 없다.


얼마 전(벌써 한 달 전), 스타벅스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난 모른다. 국민학교도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광주에 사는 작은 아버지와, 광주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사는 큰아버지를 걱정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셨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라곤 그뿐이다. 다행히 내 친척들은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스타벅스 소동이 있기 몇 주 전, 큰누나로부터 광주에 사는 작은아버지 딸이 술을 마시고서 그때의 얘기를 주정처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자는 돌아다니면 다 잡혀간다면서 오빠나 동생이 아닌 자신이 밖에 나가야 했다고. 얼마나 무서웠고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냐고. 난 그 무서움과 서러움 역시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게 상처라면 굳이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우리 주변엔 단순한 신세 한탄이 아닌, 삶을 뒤흔들 만한 상처를 받은 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아직 50년도 지나지 않았다.


실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 시대가 모든 걸 가볍게 소비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그 실수를 틈타 정치 논리를 빌미로 조롱과 혐오를 이어가는 건 뭘까? 단순히 정치와 이념이 우리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몰아간다고 봐야 할까?


계산대에서 인사를 한다. 누군가는 눈을 마주치면서 그 인사를 받지만, 대부분은 그냥 흘려보낸다. 물건을 고른 손님이 계산대에 상품을 올려놓는다. 멤버십 카드가 있냐고 질문을 해보지만 반응이 없다. 귀에 이어폰을 꽂아서 상대방이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쭉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전한다. 내 말은 여전히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공기를 떠돌다 소멸한다. 다음 손님을 응대하려다 앞선 분이 신용카드를 두고 간 것을 알고 불러보지만, 그 역시 들릴 리 없다. '나'만 존재하는 세상. 쿨하지만 배려가 사라지고 '내 목소리'만 듣는 세상. 정말 정치와 이념이, 시스템이 세상을 망치고 있는 걸까?


꼬리말) 젊었을 땐 시스템에 모든 분노를 퍼부었다.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는 시스템의 탓이었고, 사람들은 그 압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던 거 같다. 그러니까... 모르진 않았었단 얘기다. 지금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다.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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