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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로(櫟說路)

길 잃은 삶에 대한 근원적 해부


‘친부살해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리기에는 너무나 깊고 넓은 소설이었다. 지켜야 할 윤리를 잃고 표류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친부 살해라는 선정적인(?) ‘이야기’ 속에 근대인의 잃어버린 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친부 살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버지란 존재는 더럽고 불쾌하더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한 물리적 존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버지 표도르를 얼마나 혐오스럽게 묘사해놨는지 정말 제대로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다. 게다가 표도르는 애들을 버렸다! 낳기만 하고 버렸다. 심지어 스메르쟈꼬프는 강간의 결과물이다. 신이 있어도 인류가 비참함을 면치 못하는 것처럼, 아비가 있어도 자식을 버린다. 신도 부정하고 아비도 부정하고 싶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존재, 그들을 부정한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수 있을까?

큰 아들 드미트리는 돈과 여자문제로 아버지와 드잡이를 하고 죽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정말 용의자가 되어 재판을 받았고, 작은 아들 이반은 내심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고 무시하면서 죽기를 바라고, 셋째 아들 알료샤는 방관했고, 혼외 자식 스메르쟈꼬프는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집안의 무질서한 삶을 인류의 윤리적 삶으로 확대한다. 표도르만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너무나 서로에 대해 잔인하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인간들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


“사실 인간의 ‘동물적인’ 잔혹성에 대해서는 간혹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동물들에게 너무나 천부당만부당하고 모욕적인 이야기겠지. 동물들은 결코 인간들처럼 그렇게 잔인할 수 없어, 기교적이고 예술적일 정도로 잔인할 수 없거든. 호랑이는 그저 물어뜯고 찢어 놓는 것밖에 못해. 호랑이한테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귀를 밤새도록 못으로 박아놓을 생각은 하지도 못할거야…나는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경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라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게 창조해 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418)


이반의 말에 격하게 공감이 된다. 악마는 인간을 닮았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역사는 인간 잔인함의 기록이다. 우리가 이반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인간의 잔인함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악에 대한 응보와 정당한 대가를 바란다. 이반도 무고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다. 비참한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밟고서 이루어진 세계라면 신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이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필요한 것은 악에 대한 응징이다! 그렇다면 강간의 자식인 스메르쟈꼬프가 강간범인 자기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아버지를 죽였는데 이반은 미치고 스메르쟈꼬프는 자살하고 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통해 인과응보가 이루어지는 질서정연한 세계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하는 것 같다. 인간이 내리는 형벌로 악인을 처단할 수 없다. 드미트리의 법정은 법복 귀족들의 법리 논쟁터일 뿐이지 죄지은 사람을 뉘우치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상 우리가 사는 곳은 인과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하다. 부자가 가난한 이의 빵을 ‘정당하게’ 빼앗으니 응징할 수도 없다. 문제는, 이런 걸 해결할 지도자를 구한다면 우리 스스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반이 지은 <대심문관>은 여러 번 곱씹어 읽어 보어야 한다. 대심문관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존중하지 않는다. 개돼지 취급을 한다. 만인을 행복하게 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었고, 밥만 먹여주고 욕구만 충족시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더 불쾌하지 않은가? 물론 인간은 빵 없이 살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심문관은 저열한 장사꾼이다.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해야 할 욕구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적이다. 자유를 바쳐라, 그리고 먹어라. 빵과 자유를 거래한 인신(人神).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에게 갖는 경외감을 사특한 기적과 거래한 인신(人神). 그는 인간의 노예근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하는 신은 믿지 않는 자에게 벌을 내리고, 믿는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신은 인간을 상대로 거래하지 않는다. 인간을 노예로 삼은 대심문관의 현란한 변명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긴 듯 이마에 키스해주고 떠나는 신. 응보가 필요한 인간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무조건적 사랑이 신의 사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신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타인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세상에서 더 나은 동물, 사람이 되려면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 정말 무능력하게 보이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게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신의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 할 수 있다고 먼저 “믿어야만” 행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믿지 않으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세상을 새롭게 개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스스로 심리적 측면에서 다른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기 전에는 형제애란 싹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선 “고립”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도처에서 군림하고 있으며 아직 그 시기가 오지도 않았습니다. 왜냐면 지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자신만의 성취된 삶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삶의 완성 대신 단지 완전한 자살행위를 이끌어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아 실현의 성취 대신 완전한 고립에 빠지기 때문에 스스로를 감추며 자신이 가진 것을 숨기고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자신으로부터 사람들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532-533)


조시마 장로는 고립을 끝내야 사람들이 새로워 질 수 있다고 한다. 『죄와 벌』에서도 뽀르삐리는 로쟈에게 삶으로 뛰어들라고 했다. 고립을 끝낸다는 것은 우리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는 형제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이반 같은 이성주의자들과 과학 신봉자들, 합리주의자들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은 주고 받는 계약 속에 사랑과 응보를 생각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해결방안, 즉 ‘신을 향한 믿음 속에 선의 실천과 인간의 갱생’ 같은 얘기를 쓴 그를 정말 철 지난, 보수적인, 전근대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만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만인을 죽인다. 너를 죽이면 나도 죽는다는 생각을 깨우치지 않으면 이 비극이 끝날 수 있을까?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설교한다. 인간은 무한 영겁의 세계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단 한 번 부여된 존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묘하게 비틀어 사랑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믿을 수 없다. 장로는 인간의 정의부터 다시 한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활동적인 사랑의 순간이 한 번, 단 한번만 부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지상의 삶이 부여되었고 그와 더불어 시간과 제한된 세월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에 겨운 존재는 소중한 선물을 거절하고 존중하지도 아끼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말았습니다.”(568)  

내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 이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 어떤 윤리도 이익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황폐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묻는 사람들에게 조시마 장로는 인간이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임을 굳게 믿고 살라고 한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친부살해의 막장 드라마 속에 숨긴 너무나 감동적인 설교지만 여전히 내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호홀라꼬바 부인도 이렇게 물었다. “인류를 사랑하지만 개인에 대해서는 적개심만 남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105)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105)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정답이다. 하지만 이반이 그랬고 우리가 그렇듯, 할 수 있는 일은 하기 싫다. 안락에 빠진 노예상태가 이렇다. 누군가가 약속하는 행복의 나라로 가지 않고 이 힘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길이다. 그러므로 멀고도 험난하다. 그러나 그 길을 통과한 자만이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들 수 있다. 엉망 진창의 길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 별이 반짝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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