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무와 마음의 평안이 당신의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욕망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뒤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야심과 연애가 얽힌 궁정 생활은 프랑스나 조선이나 중국이나, 전 세계 어디든 공통적인 현상 같다. 궁정에서만 이런 것은 아닐 터, 보통 남녀의 연애가 그저 연애일 수 없는 이유는 작게는 일신의 귀천과 집안의 흥망이 달렸고 크게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춘향이가 신분을 뛰어 넘는 사랑을 했나? 춘향이는 연애로 신분이 상승했다. 춘향이 처지에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을 지킬 방도는 짝짓기밖에 없었다. 다른 수가 있었다면 그렇게 말도 안되게 변사또에게 저항하고, ‘절개’라 하는 신분에 맞지도 않는 윤리를 무기로 썼겠는가?
춘향이가 스스로 귀하게 되는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했다면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마저 허무한 것임을 깨달았다. 1678년 발표된 소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런 연애 감정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절세 미남 미녀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프랑스 궁정 생활은 순정만화로도 그려질 법한데 그렇지 않았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결론은 그 ‘순정’의 환상을 깨기 때문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연애와 야심과 권력이 얽힌 궁정의 연애 스토리를 경험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덕스러움과 사랑이 호감으로만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결혼 계약이나 아버지의 권력 아래서만 사회적 자산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은 어떤 처신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클레브 공작부인>은 시대를 앞선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돌봐주기를 애원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보는 여성. 클레브 공작부인.
백 여 년 쯤 후, 세상이 뒤집어져 왕과 왕비가 군중 앞에서 목이 잘려나갈 운명 같은 건 까맣게 몰랐을 호화, 찬란, 우아한 앙리 2세 시절, 왕궁을 가득 채운 건 연애사였다. 결혼은 형식, 내용은 연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나 할 것 없이 연애에 얽혀 있었는데 그것을 단지 “연애”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누가 누구와 결혼을 하고, 누구와 연애를 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적시한다. 누가 누구의 총애를 받고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서열. 클레브 공작부인이 처녀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끊임 없이 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먹고 생각하는 일이란 게 고작 출세욕과 아첨.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는 하고, 혹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뿐 편안함과 한가로움이란 없는 곳. 궁정이라는 곳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큰 코를 다치게 된단다. 도대체 무엇무엇답다라든가, 무엇무엇스럽다라는 것은 거짓이게 마련이니까
어머니는 마치 궁정 연애사에 휘말렸다 살아난 사람처럼, 딸에게 궁정 생활에 대한 동경을 ‘환상’이라고 가르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딸이 남자들에게 어떤 유혹을 받고 어떤 길로 빠져들지를 훤하게 아는 듯, 어머니는 딸을 감시한다. 그렇다고 청춘 남녀의 연애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생겨남과 동시에 권력관계에 얽혀 드는 것이 이 “순수한 연애감정”의 비극적 운명이지만(사실은 권력관계와 무관한 연애란 없지만 연애는 순수하다는 환상을 믿는 사람들에겐 비극적이겠다) 어머니가 아무리 부덕과 이성의 힘을 가르쳐도 서로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클레브 공작부인과 느무르 공작의 연애 감정은 막을 수가 없었다.
처음 클레브 공작과 결혼했을 때 그녀는 신분에 걸맞는 남편을 맞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클레브 공작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인 일종의 계약 같은 결혼을 했다. 그건 남편인 클레브 공작도 인정한다. 남편의 특권은 주어졌지만 아내의 마음속에 자기 자리가 생긴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내의 자리를 채우고 남편의 역할을 얻는 그런 형식적 결혼. 그런데 클레브 공작부인이 느무르 공작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여성 사람이 남성 사람에게 갖는 호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감정이 누구의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 게 아니란 것. 클레브 공작 부인은 그제서야 남편이 자기에게 바란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자신은 결혼한 몸.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지키려면 느무르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별장으로 도망치지만 오히려 틈만 나면 떠오르는 건 느무르의 얼굴!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타오르는 연정은 스스럼 없이 별장에 침투해서 그녀를 몰래 엿보게 하고,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할까봐 질투심에 불타오르게하고, 남에게 광고를 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떠들 수 있는 말은 모두 떠들어 자랑했다가 후회하게도 하며, 부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의심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엄청난 감정이다. 사랑은 아주 강한 배타적 소유욕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갖고 싶은 엄청난 소유욕이 발동하는 것. 네 몸도, 네 감정도, 네 재산도 다 내꺼! (사실, 프로이트 식으로 설명한다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곧 자기애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 보존의 욕구가 강한 동물이니 자기애도 타인을 사랑하는 자기애도 배타적이고 독점적일수밖에 없는 것)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이 이런 강한 배타적 소유욕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길고 오래 가지도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허우적거리느라 알아채지 못하는데 클레브 공작부인은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 보는 듯,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들이 일렁인 길을 따라 성찰해 본다. “남편이 죽고 자유 부인이 되어 느무르 공작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소설이 끝났으면 살롱에서 귀부인들이 하던 잡담으로 끝났거나 순정만화로 각색 될 뻔했으나 클레브 공작부인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자유로운 몸이고 저도 그러한 몸이므로, 지금 우리들이 장래를 약속한다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리는 없겠지요. 그러나 남자들은 영원한 약속을 맺은 뒤에도, 계속 사랑의 정열을 이어가지는 못합니다. 모든 행복의 원천인 저 정열이 식어가는 것을 지켜 보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에다가 어떻게 내 몸을 갖다 놓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정열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저를 차지하는데 방해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요.. 장애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집착을 불러일으킨 셈입니다.
클레브 공작 부인은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의 감정을 남편에게만 향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럴 수 없음을, 그리고 그 감정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고 그 변덕에 자신을 맡기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랑을 하면 이성도 마비돼 버리지 않는가? 그 뒷감당은 쓰고도 쓰다는 걸 부인은 알았다. 누구와 짝짓기를 할 것이냐를 집요하게 강요하고 요구하는 사회에서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간 클레브 공작부인. 이런 부인을 금욕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다. 만약 이 소설을 금욕주의의 교과서로 만들어 누군가에게 수도원에서 은둔하라고 강요한다면 욕먹을만하다. 그러나 소설 속 클레브 부인은 스스로 사랑의 감정에 대해 성찰하고 선택했다. 저마다 제 욕망을 따라 살다가 망신 당하고 때로는 가산을 탕진하고 일신의 보존도 이룰 수 없는 삶을 살다가 왜 그렇게 된 지도 모르고 죽는 사람들에 비하면 클레브 공작 부인은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고 달콤하고 짧은 행복보다 길고 평온한 행복의 길을 갔다.
사랑도 일종의 표현 불가능한 감정이다. 어떤 사람이냐, 언제 만났느냐, 말 그대로 “케바케” 다르므로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공식만을 ‘사랑’의 정의로 미리 상정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클레브 공작부인의 마지막 선택이 불만스럽다. 느무르 공작이 절규하듯, “아니 도대체 왜? 나랑 결혼 안 한다는 거야? 내가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고 남편도 죽었는데” 사랑을 갈구하는 느무르 공작이 안돼 보일 정도다. 그러나 공주가 공주와 나눈 우정은 사랑이 아닌가? 공주가 말을 사랑하면 애마인인가? 공주가 마차나 경주를 사랑하면 그저 덕후인가? 그건 사랑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클레브공작부인>의 미덕은 사랑을 정의하지 않고 그 감정이 마음의 평화와는 양립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고요함 보다 변덕스러운 격랑을 원하면 화려하고 우아한 궁정생활에 익숙해지고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나도 음모와 간계를 쓰면 된다. 그러나 “나는 원하지 않는다.” 모든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라도 나는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 클레브 부인. 도피일 수도 있고, 이기적인 자기애 일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의 이 부인이 자신의 결정대로 원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 만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여인이라 생각한다.
부인의 예상대로 느무르 공작은 처음 죽을 듯이 괴로워하다가 서서히 클레브 공작부인을 잊었다. 그 전에도 느무르 공작의 연애는 끊이지 않았고, 무려 영국 여왕의 호감도 받던 미남자 아니었던가. 클레브 공작부인은 한해의 반은 수도원에서, 반은 자택에서 지내며 가장 청정하고 성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공주가 왕자를 사랑해야만 사랑인 줄 아느냐? 공주는 스스로를 가장 사랑했다…라고 외치는 소설 <클레브 공작부인>이었다.
*생소한 작품이었으나 의외의 반전을 가진 17세기 소설...명작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