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 민음사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p.364
자신의 젊음도 사랑도 뒤로 한 채 오직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영국의 저명한 저택, 국제회의 장소로도 유명했던 ‘달링턴 홀’에서 평생 집사로 살아온 스티븐스가 그 주인공이다. 새로운 주인으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그 집에서 일을 하는 그의 시점에서 보는 일상은 잔잔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초반에는 집사의 위대함과 품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던 그가 책의 제목 ‘남아 있는 나날’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저자는 그를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해답을 얻고 싶어 더 집중해서 읽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집과 함께 남았군요.
일괄 거래에 낀 한 품목으로서.
p.369
달링턴 가문이 200년 넘게 소유해왔던 저택을 미국에 살던 패러데이 어르신이 인수를 하게 되고, 전 주인을 모셔 온 직원들의 높은 명성을 들었던 어르신이었기에 그들이 계속 남아주길 원한다. 그렇게 해서 남게 된 집사 스티븐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르신이 다섯 주 정도 미국에 돌아가 지내기로 했으니 그 기간 동안 집에만 머물지 말고 휴가를 떠라라는 권유를 한다. 집을 비우고 어딘가를 가본 적이 없는 스티븐스였기에 처음엔 휴가를 마다하다 추후 달링턴 홀에서 같이 일했던 켄텐 양의 편지를 받고 생각을 바꾼다.
켄턴양 그녀의 편지 어디에도 복귀 의사를 뚜렷이 밝힌 대목이 없었음에도 달링턴 홀 시절의 깊은 향수가 듬뿍듬뿍 밴 여러 구절들의 전반적인 뉘앙스로 그녀가 틀림없이 복직을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를 직접 만나 의사를 확인하고자 생애 첫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아니, 이건 무슨 자신감?!)
여행 6일 동안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를 통해 그가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본인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집사라는 직업을 가지고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달링턴 경에게 받쳐왔던 그는 여행 내내 위대한 집사가 무엇인지 집사의 품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일화까지 들먹이며 정말 이 사람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
p.370
자신의 앞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모시는 주인이 보증까지 할 정도로 믿음을 받아왔던 그는 자신이 봉사해 온 세월을 돌아보며 위대한 신사에게 자신의 재능을 받쳤다고 말한다. 긴 세월 동안 그분을 모시면서 자신이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곳에서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움직여지는 이 나라의 사안들을 처리하는 모습들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티븐스 당신은 정말 진품이라고. 진정한 영국의 노집사. 이 집에 삼십 년을 넘게 있으면서 영국의 진정한 귀족을 모셔 왔다고 했소.
p.195
그래서였을까? 그가 이렇게 위대한 집사와 품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한 이유가?
위대한 집사와 품위라는 단어는 어쩌면 그의 인생을 대변하던 단어였을지 모르겠다. 친부의 임종을 지키는 일도 포기했고 동료 켄턴 양에 대한 감정도 뒤로 한 채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면서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모셔왔던 주인을 통해 자신도 세상의 변화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 히틀러에게 이용당하고 매국노로 지탄을 받다 폐인이 되어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스티븐스였기에 자신이 잘못 살지 않았음을 이리도 절박하게 이야기하고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그래요,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p.372
「남아 있는 나날」은 역사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사이의 전간기를 배경으로 스티븐스의 시점으로 보는 당대 영국의 시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역사는 그저 하나의 소재로만 보였다. 자신의 젊은 날을, 사랑을 모두 뒤로 한 채 살아가야 했던 한 인물이 너무 안타까워 그만이 눈에 들어왔다. 집사로서의 품위는 가졌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갖지 못한 그가.
그리고 그를 통해 독자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스티븐스처럼 황혼 녘 때쯤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았을 때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애태우지 말고 지금 현재를 즐기며 살라고 그리고 지금 가진 것도 더없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남아 있는 나날, 당신은 어떤 삶으로 채워왔고 앞으로 어떤 삶으로 채워나가고 싶은가?
내가 가진 가즈오 이시구로 저자의 책 4권 중 제일 마지막에 읽은 「남아 있는 나날」, 마지막에 읽기를 너무 잘했다며 셀프 칭찬을 하며 다음 말을 가슴 깊이 새겨본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p.372
ps. 마지막까지 새 주인과의 관계를 잘 이끌어 가기 위해 자신의 부족한 농담 실력을 키울 거라고 다짐하던 그, 정말 뼛속까지 집사이다. 그래도 그에게 이 농담이 상호 소통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