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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hyun님의 서재
  • 모경의 빛
  • 박형숙
  • 13,500원 (10%750)
  • 2025-05-21
  • : 511
아버지, ‘창밖의 나그네’여!-박형숙의 두 소설에 함부로 붙인 군말 박형숙의 소설집 <모경(母敬)의 빛>에는 작가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 <오십 원만>과 <열일곱 살의 강> 두 단편소설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이 연작소설은 ‘가족 소설’이라 불러도 좋은 만큼 다른 작품에서도 그 가속의 일곱 식솔이 이저리 언급되기는 한다. 두 작품을 정독하고, 나는 신경림의 시 <아버지의 그늘>과 김남주의 시 <나그네>를 찾아 다시 찬찬히 심호흡하며 읽었다. 그 시들은 각기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과 <사상의 거처>에 수록된 작품들이고, 두 시집은 두 분이 생전에 사인해서 나에게 손수 주신 터라, 시집 발간 당시 그 선생님들과의 만남과 추억이 유발하는 정서적 ‘떨림’ 없이는 읽을 수도 없는 서책이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 소설가 박형숙의 사회적 문학적 행로가 어쩌면 두 시인의 길 사이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짐작에 더욱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에서조상 대대로 토지 없는 농사꾼이었다가꼴머슴에서 상머슴까지열 살 스무 살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였다가한때는 또 뜬세상 구름이었다가에헤라 바다에서 또 십 년 배 없는 뱃놈이었다가도시의 굴뚝 청소부였다가공장의 시다였다가 현장의 인부였다가 -김남주 <나그네>에서 보다시피, 앞의 시는 신경림 시인이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뒤의 시는 김남주 시인이 아버지 인생의 우여곡절을 열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형숙의 두 소설에서 아버지(작가의 실제 아버지와 작품 속 아버지 사이에는 편차가 의당 있을 것이다!)는 누구인가? <오십 원만>에서 화자 <나>의 아버지는 ‘오십 원’을 달라는 막내딸의 간청마저 끝끝내 뿌리친 매정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 직전에도 <나>는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를 무감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 저 왔어요.>가 <나>의 말이었고, <어, 어>가 아버지의 말이었다. 이토록 짧은 단어의 조합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렇게 뇌경색으로 7년이나 집안에 갇혀 지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도 심지어 <나>는 후일에 기억하지 못한다. <오십 원>을 달라던 8살 무렵의 기억 이후 <나>는 아버지를 주로 <미련한 곰>으로 회상한다. 그러다가 사춘기 이후 <나>에게 아버지는 말이 없는 <뺑기쟁이>였다. 예민한 환절기 소녀는 <마음의 통증>을 감내하며 <경멸과 천시>의 그 호칭을 수용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문학에 빠져든다. 아버지라는 <노동 기계>를 둘러싼 집안 환경에 모종의 반항심이 <나>에게 생긴다. 더구나 고교 진학을 원하는 딸에게 <여자가 학교는 무슨>이라는 아버지의 차디찬 말까지 듣자, <나>는 드디어 아버지가 <장애물>이라는 과격한 생각에 이른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어느덧 한랭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간신히 고교로 진학하고 대학으로 간 <나>는 마침내 아버지의 가정에 등을 돌린다. 대학 시절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운 노동계급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적도 있지만, 그 무렵 불어닥친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적 격변으로 그것도 금세 허물어진다. 결국 아버지의 세계를 구성하는 <무지, 무감각, 무취미, 무정> 등과 <나>는 결별한다. 그리하여 그 부녀는 어느덧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일상 곳곳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아버지를 여러모로 닮은 오빠를 만난다. 거기서 <나>는, 열다섯에 고아가 된 뒤로, 스물다섯에 청상과부가 된 형수 밑에서 더부살이하던 아버지가, 열일곱 살부터 <곁눈질하지 않고 한길을 갔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랑아나 깡패로 전락하는 산동네에서, <나>의 5남매가 그나마 온전하게 성장하였음을 오빠한테 듣는다. 그건 <나>와 아버지의 간극을 좁히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오랫동안 결핍으로 또는 상처로 남았던, 받지 못한 <오십 원>을, 이제 받지 않아도 된다고, ‘꿈속에서’ 목 놓아 울며, 아버지에게 말한다. 그리고 <페인트가 묻은 일복을 입고 가방을 멘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채로>, 마당으로 나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아버지 모습을 <나>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본다. 그때 사라진 아버지를 다시 소환해 새롭게 해석한, 그 후일담이 <열일곱 살의 강>이다. 이 소설은 시적 비유와 정적 묘사가 중심에 있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큰 서사는 별로 없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은 시를 읽듯이 곱씹으며 차근차근 읽어야 제맛이 난다. <나>는 집에서 열흘 휴가를 얻어 글을 쓰러 강원도 주천강 근처 집필실에 왔다. 어렵게 얻은 기회에도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오십 원만>에서 아버지를 제대로 조형한 게 아니라 <나>의 감정만 특히 분노만 드러냈다는 자책과 회한 때문이다. <나>의 마음 속 눈물인 양 쏟아지는 폭우는 그런 심정을 대변하리라. 비가 계속 퍼붓는데도 고양이 부모가 힘껏 새끼들을 돌보는 장면도 <나>의 자책과 회한을 더욱 고조시킨다. 雨上加雨(우상가우)로 비는 억수가 되어 주천강을 위협한다. 그 와중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여자가 ‘겁나게’ 밤 나들이 했다가 미친개일지 모를 짐승을 본다. 그 짐승이 이들 주변을 쏜살같이 지나가자 <나>에게도 공포가 엄습한다. 이는 시골의 야밤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드러내며 표면적으로는 소설적 긴장을 부여한다. 소설 읽기를 부추기는 이 장면은 어쩌면 화자가 아버지를 제대로 조형하지 못했다는 심리적 불안을 암시하거나, 죽음이나 질병이나 가난 같은 인생의 느닷없는 <복병>으로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쉽게 갑자기 파괴되는가를 연상하게 하는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우리네 가정이나 식솔을 부양하는 게 무척 힘든 일이요, 아버지는 늘 그런 위협과 공포로부터 가정을 방어하는 수호자임을 은연중 내포할지도 모른다. 비는 내리고 내려 급류를 조성한다. 열입곱 살 때 모아놓은 돈을 잃고도 형수댁 더부살이 처지라 침묵해야 했던 아버지, 페인트공으로 일곱 식솔의 家長 역할에 충실했음에도 다른 사람 앞에서 등을 구부리고 위축된 모습을 자주 보인, 말이 없는 사람으로 <나>에게 비쳐졌던 아버지, <풍진 세상>의 한파와 풍파를 다 겪은 아버지가, 급류라는 세파에 쓸려갔듯이, 그의 페인트 도구들과 그가 즐겨 사용하던 물건들도 그 급류 속으로 휩쓸려 간다. <상류에서부터 떠내려온 듯했>던, <살갗이 다 벗겨지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검은 개>는, 열일곱 살 이후 줄곧 급류 속에 살다 그 속으로 사라진 아버지의 인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반추를 거쳐 <나>는 이제 <열일곱 살에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가엾은> 아버지의 삶을 새로이 해석한다. 그리하여 폭우와 같은 위험이 가정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가족의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渾身(혼신)의 힘을 보탠, 아버지에게 다가갈 길을 <나>는 결국 찾는다. 공무도하가가 그 길을 연다. 이는 열일곱 살에 일찌감치 험한 세상이라는 강물에 빠져 생애 내내 그곳에서 허우적거렸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사랑과 회한을 담은, 때늦은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애통하고 절절한, 思父曲이다. 김남주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에서 말한다. 엄마의 입을 빌려, 아버지가 자식 생각에 일만 하다 불쌍하게 죽은 사람이라고! 참 불쌍한 사람이어야 일만 평생 죽자살자 하고 자식덜 덕 한번 못 보고 저승 사람 됐으니께 느그 아부지가 너를 을마나 생각했는 줄 아냐 신경림도 위의 시에서 말한다.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에 비해 시인이 얼마나 초췌하게 살았는가를 뼈저리게 정의한다. 자신은 <늙고 초라한 아버지>일 뿐이라고.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중략...)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박형숙은 <열일곱 살의 강>에서 말한다. 그이는 울음을 삼키며, 그러나 ‘속울음’으로 시커멓게 변한 가슴을 움켜 안고, ‘아버지! 우리 일곱 식구 살리려고 온갖 진일 하시다가 늙고 병들고, 평생 흙탕물 요동치는 위험한 급류에 끝내 휩쓸리시더니, 그 강물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지셨네! 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마음만이라도, 혼이라도 부디 그 강 건너 우리 곁으로 어서 오셔요!’라고. 일생 집 바깥에서, ‘창 밖에서’, 서성서성하던 ‘나그네’나 다름없던, 아버지를, 식구들 옹기종기 모여 웃음을 나누는, 따스한 방의 안으로, 박형숙은 아버지 손잡고 잰걸음으로 들어간다. 보기 참 좋은, ‘봄날’의 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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