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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hyun님의 서재
  • 모경의 빛
  • 박형숙
  • 13,500원 (10%750)
  • 2025-05-21
  • : 505

박형숙의 연작소설 <모경의 빛>의 첫머리에 들어간 소설은 <너의 기원>이다. 이 소설은 <너>의 암 투병기를 중심으로 한다. 박형숙은 이 소설에서 유방암이라는 단어 대신에 암이라는 보통명사만 사용함으로써 <너>의 암이 다른 모든 암과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할뿐더러 치료 과정도 유사함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너>는 두 여성을 중간에서 함께 바라본다. <가슴 양쪽에 각기 2센티 미만의 새까만 덩어리와 미세석회가 흩어져 있다>는 <너>가 투병에 성공하면 <한쪽 가슴>의 절제로 치료가 마무리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작가처럼 될 터이고, 실패하면 교직원처럼 공포와 불안 속에서 치료를 계속할 터이다.

이 작품의 특별함은 이런 <투병기>가 매우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의학적 전문소양을 많이 비축한 듯한 화자가 그 과정을 소상하고도 정밀하게 소개한다. 그야말로 암 치료의 모든 과정을 교과서처럼 일목요연하게 이 소설은 제공한다. 이처럼 항암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정교하게 설명한다는 점에서, <너의 기원>은 병원에 비치돼야 할 필수품이나 암 환자의 필독서 같은 인상을 준다. 동시에 이 소설은 뛰어난 자연주의적 작품이 내장하게 마련인 생생한 <다큐>의 외모를 일부 보인다.

그 치료 과정에서 주인공은 수많은 병리적 정서적 정신적 변화를 겪고, 갖은 고통과 공포에 시달린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건강했던 날들의 기억을 떠나보내라고. 마음을 흥분시키지 말라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 숨 쉬는 데에만 열중하라고> 자신을 다독인다. 그리고 <너>는 너의 몸에게 <그동안 많이 괴롭혔어. 정말 미안해>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 덕분인지, 마지막 주사와 방사선 치료를 간신히 마치고서야 머리카락이 다시 조금씩 자라는 것을 그는 목격한다. <너>는 일단 암 치료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치료 과정을 거치며, <너>는 거의 반 세기를 아우르는 자신의 삶 전반을 종합적으로 회고하며 성찰한다.

<너>의 회고와 성찰은 기억이 되살아난 8살 때로부터 시작한다. 8살에 서모 밑에서 자란 엄마가 <가난과 병>으로 지친 일상 속에서도, 5남매의 장래를 생각해 액자에 한자로 써놓은 <努力成功>이라는 네 글자가 그 단초가 된다. 엄마가 그 글자로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산동네 작은 방>에 살던 <너>는 일찌감치 파악한다. 그리하여 <너>는 그 보이지 않는 <명령>과 <목소리>에 발맞추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인생을 줄곧 산다.

그는 엄마 상비약인 신경안정제를 사러 약국으로 달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지각하지 않으려고 달리고, 대학 때는 운동권 학생으로, <5.3 인천 시위에서, 신길동에서, 왕십리에서, 87년 명동>에서도 <사복경찰>에 잡히지 않으려고 죽도록 달렸다.

이런 온갖 <노력>의 다른 이름인 <달리기>로 과연 그는 성공했는가?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해서 잠시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일시적으로 맛본 적은 있다. 그러나 그 생활이 기계 부속품의 역할과 같다는 생각에 그는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그 대신에 꿈꾸던 시나리오 작가가 된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도 그는 이내 절망한다. 작가로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자 도래한 우울증이 그를 괴롭힌다. 그때 결혼은 그 돌파구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너>의 달리기는 결혼 후에도 계속된다. 그 세목은 소설에 잘 요약돼 있다. 육아, 아파트 장만, 집안 살림 챙기기가 그 주된 세목을 이룬다. 하지만 두 아이를 키우고 가사를 돌보느라 <너>는 <경력단절녀>가 된 상태다. 아이가 크자, 뒤늦게 그는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 나선다.

<학창 시절에 가졌던 꿈, 데모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사회, 영화에 빠져들면서 만들어보고 싶었던 어떤 세상>은 이제 그와 무관한 것이 돼버렸다. 당장 생계에 보탬이 될 수입(임금)이 <너>에게 절실하다. 여러 직업과 직장을 거쳐 겨우 마트 캐셔 일자리를 얻어 살 때, 좀 살 만해질, 바로 그 순간에, 암이 <마치 오래전부터 네게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손님>처럼 <너>에게 들이닥친 것이다.

이런 삶의 여정은, <너>가 보기에는, 엄마가 원하던 성공적인 삶이 아니다. 죽도록 달리고 열심히 온갖 일을 하며 살았지만, 그의 인생은 그닥 성공하지 못했다는 씁쓸한 결론을, 그는 어쩔 수 없이 내린다.

그러나 그는 <괜찮아.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며 자신을 달랜다. 이런 위무는 암 투병의 과정에서 터득한 새로운 ‘지혜’ 덕분이다. 달리느라, 성공을 위해, 몸을 너무 괴롭혔다는 깨달음이 특히 이런 지혜의 씨앗이 된다.

암 투병에서 일차적으로 승리한 <너>는, 그 과정에서 얻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지혜를 밑거름 삼아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살펴본다. 우선 종종 가던 동네 동산의 나뭇가지에서, <봄이 한창>이라 더욱, 여기저기서 꽃송이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너>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뿐만 아니라 풀밭으로 <너>의 눈길이 이동하니 작은 꽃들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도 <너>는 발견한다. <쇠별꽃, 괭이밥, 뱀딸기꽃, 좁쌀냉이, 흰젓제비꽃> 같은, 평소 보지 못했던 작은 들꽃을 <너>는 발견한 것이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이제 <너>의 <새로 생겨난 습관>이 되었다.

그 시각적 습관과 함께 <너>는 어느새 바람 소리를 듣고 흙냄새도 맡는다. 이렇게 그의 감각은 눈에서 출발해 귀와 코로 넓게 열린다. 자연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그 크게 열린 감각을 따라가다, <너>는 마침내 <찬란했던 어느 봄날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너>는 마침내 <네 안의 어딘가에서 흘러넘치는 빛>, <너를 따뜻하고 환하게 비춰주는 빛>을 발견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암 투병이라는 큰 시험대를 힘겹게 넘은 <너>가, <꽃>을 징검다리로 삼아, 밝고 따스한 <빛>을 발견하는 여정을 조형한다. 그 빛은 마치 모네 등의 인상파 화가들이 발견한 빛과 흡사하다. 그 빛은 예로부터 존재했음에도 새로운 눈의 화가들에게 아주 늦게 발견되었듯이, 이 작품의 <너>도 지독한 과정의 암 투병을 거치며 얻은, 새로운 눈으로, 그 빛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빛은 어디에서 왔나?> <너>가 오랫동안 <상처며 아픔이며 고통의 기원이라고 여겼던> 가족과 그 거주지인 산동네에서 그 빛은 온 것이다. 성공의 미명(美名) 아래, 앞만 보고 달리느라, 부지불식간에 <살해>한 가족과 그 누추한 거처가 바로 그 빛의 출처임을 <너>는 드디어 깨닫는다.

어느새 <너>의 빛이 된, 그 가족과 왕십리 달동네를 우리는 만날 차례다. 이 연작소설집은 <모경의 빛>이라는 표제를 내세웠으니, 그 빛은 우선 <모경의 빛>이다. 그런즉 <너>의 분신인 <인해>의 엄마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 <모경(母敬>이, 소설 <너의 기원> 뒤에 배치된 것은 당연한 순서다. 이제부터 <너>의 빛이 된 이들과 그들의 공통 무대를 축으로 펼쳐지는, 달동네 사람들의 가슴 아리면서도 훈훈한 사연을, 근대화 도시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그 급류를 헤쳐 나갔는가를, 우리는 차례차례 볼 수 있으리라. 그것은 우리의 근대화와 도시화의 구체적 행로와 귀착을 풍속화처럼 혹은 드라마처럼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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