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 알토, 스페인어로 '큰 나무'라는 뜻의 이 도시는 샌프란시스코와 산 호세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이 도시에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만큼이나 유명한 대학, 스탠포드 대학이 위치하며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말콤 해리스는 팔로 알토 출신이면서도 2011년 월가 점령 캠페인을 주도한 인물이다. 나아가 그는 이 두꺼운 책을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이 살기 좋은 동네에서 어린 학생들이 연달아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 '살기 좋은 동네'에서 그러한 사태를 초래한 것일까?
이어서 이 책은 팔로 알토라는 도시, 나아가 이 도시를 포함하는 캘리포니아라는 지역이 1850년대 미국의 소유가 되는 과정에서 시작해, 골드 러시로 이어지는 캘리포니아의 급성장, 스탠포드 대학의 설립, 팔로 알토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스탠포드 대학을 거쳐간 여러 학생, 학자, 사업가들과 미연방 정부 산하의 다양한 기관들이 뒤얽히며 형성된 촘촘한 '미국적인 정경유착' 혹은 비즈니스 네트워크의 고착,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의 사반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아는 21세기 현대 사회(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탈산업사회,' '제4차 산업혁명,' '제3의 물결'과 같은 여러 명칭을 사용한다)의 등장 과정을 추적한다.
이렇게 요약하면 이 책의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 말콤 해리스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이러한 미국의 한 지역으로서 팔로 알토라는 지역의 경제적, 지적 위상의 발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서술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스탠포드 학자와 학생들, 그리고 그와 연계된 창업자나 기업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포티나이너스에서부터 릴런드 스탠포드까지, 루이스, 프레데릭 터먼에서부터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저커버그까지.
이 점에서 저자 해리스는 이미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실리콘 밸리의 유명 창업가들, 흔히 '차고 속에서 미국에서 제일 가는 대기업을 일군 거인들'이라 이상화하는 인물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생각하면 바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정치인들은 항상 '미래 먹거리'를 강조하면서 미국 거인들의 정신을 본받아야 하며, 한국에서도 이런 거대 기업들을 탄생시킬 필요성을 강조하고는 한다.
이러한 '거인'들이 세운 회사로는 미국의 시가총액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매그니피센트 7이 대표적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페이스북, 테슬라, 엔비디아의 창업자들은 거의 다 미국 서부, 태평양 연안 지역(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와 시애틀)과 관련이 있으며, 많은 경제지나 경제/경영서적에서 아주 긍정적인 인간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어떤 점에서, 이런 '거인'들의 신화는 이미 21세기 현재 전 세계의 '경제영웅'의 신화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중국이든, 한국이든 간에 출신지와 상관없이, 이들 거인 혹은 경제영웅들은 미래를 향한 비전을 보여주고 제시하는 인물로서 그들의 발언 하나하나가 전 세계 주식, 코인, 환율 가격을 변동시키며, 때때로 이들의 비판적 발언은 경제라는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소프트 경영에서 물러난 뒤 각종 자선 재단을 설립하여 기부 및 자선사업을 이어가면서 흔히 '선한 영향력'을 대표하는 은퇴 기업가로 자리잡았다. 반대로 일론 머스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와 각종 물의를 일으키는 발언, 나아가 최근 들어 정치에 발을 담그며 각종 논란의 중심이 되면서 부정적인 면모를 이전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저자 해리스의 관점에서 보면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는 사실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도 미국적이며 자본주의의 첨병이라할 팔로 알토, 스탠포드, 실리콘 밸리가 주도하는 현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일뿐이다. 즉, 이들의 창업과 성공은 기본적으로 실리콘 밸리 지역이 보여주는 자본주의 구조 내에서의 경제적 성공이라는 공식의 일부이다.
여기서 해리스는 이런 '경제영웅'들이 어떻게 영웅으로서 시련을 극복했는가 그 과정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해리스의 이 책, 『팔로 알토』는 팔로 알토로 상징되는 실리콘 밸리, 캘리포니아, 미국의 빛과 그림자, 혹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보여주게 된다.
이 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면 캘리포니아가 경제적 중요성을 띠게 된 19세기 중반, 골드러시 무렵부터 이런 '경제영웅'들은 누군가들을 희생시켜 영웅이 되는 과정이다. 단지 우리가 20세기 후반-21세기 초의 주요 경제영웅들만 기억하기에 그 이전의 경제영웅들은 부각되지 않을 뿐, 팔로 알토에서는 경제영웅들이 늘상 그래왔다는 것이다. 그 희생자들은 19세기 초중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기까지는 미국 내에서 이주한 흑인을 비롯해 멕시코, 중국, 일본, 한국, 인도 등지에서 이주해온 노동자들, 20세기 중반부터는 동남아, 인도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이들 이주자들은 경제영웅들을 위한 노동력을 과잉공급하면서 그 대가는 턱없이 적게 받아가며 경제영웅들을 위해 희생되고 종국에는 그 존재까지 잊혔다. 물론 여기서 '잊힌'이라는 의미는 대중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의미이다. 적어도 20세기 중후반부터 역사학, 특히 미국 역사학은 이런 잊힌 존재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려 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백인 경제 영웅의 영웅적 행보를 정당화한 요소 중 하나가 백인 우월주의다. 저자는 스탠포드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스탠포드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 그리고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경마에 사용할 훌륭한 경주마를 육성하는 과정, 나아가 이러한 '우생학'이 백인의 우수성을 정당화하는 인지적 도구로서 활용된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우생학'은 스탠포드 대학을, 나아가 미국을 우수한 백인 남성을 육성하는 장소로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으로서 20세기 내내 작용했다. 덧붙여 이러한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로 알토의 경제영웅들이 시련을 헤쳐나가는 경제 영웅의 여정을 '영웅의 여정'답게 포장하는 역할도 겸했다. 경제적 착취나 사회적 차별에 불과한 행위조차도 관점에 따라서는 기업, 나아가 국가를 살리기 위한 영웅적인 결단이 될 수 있는 법이다.(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물론 20세기 중후반 들어서 이러한 경향은 바뀐다. 20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백인 우월주의도, 그 아래 가려진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도 가려져버린다. 첫째는 경제영웅들이 착취하는 대상이 미국 내에서 미국 외부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세계화 경향이라 일컫는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태평양 연안의 여러 국가들의 저렴한 생산력을 이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제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타국의 현지 노동자가 착취당하며,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속한 나라의 문제이지, 미국 내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두 번째는 새로운 개념이 이주 노동자들을 가렸다는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경제영웅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럼 무엇이 이를 가리고 있을까? 바로 소비자다. 미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소비자의 데이터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으며,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기업들의 소비자 데이터 수집을 묵인했다. 애초부터 이런 경제영웅들과 그들의 기업들은 노조에 적대적이었고 각종 이주 노동자를 쥐어짜는데 능했다. 거기에 이제는 소비자 문제까지 끼여들면서 노동이라는 문제는 소비라는 주제에 잡아먹힌 꼴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허버트 후버다. 세계 곳곳의 광산을 개발한 엔지니어이자 대통령 자리에 까지 오른 후버는 결국 대공황으로 인해 불명예스럽게 정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나 후버라는 인물은 20세기 중반까지 현재 미국 및 전세계 자본주의 구조를 정당화할 사상적 씨앗을 뿌리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 씨앗을 뿌린 장소는 당연히 스탠포드 대학이다. 후버의 계승자들은 후버의 사상을 변주해가며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반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후버의 씨앗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으로 결실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경제영웅'들이 그림자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이들, 특히 20세기 초중반 스탠포드 대학 및 팔로 알토에 자리잡고 활약한 학자와 학생들 중에는 21세기 현재 상용화된 여러 기술들의 태동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각종 무선통신기술과 컴퓨터 관련 기술은 스탠포드를 졸업하거나 스탠포드 대학 및 팔로 알토를 거쳐간 인물들의 손에서 유명한 미국의 기업들로 변모하고 상품으로서 상용화되었다. 이 같은 상품들, 대표적으로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은 우리 삶에 너무 깊이 자리 잡아 이런 제품 없는 시대는 상상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예컨대 이 책에서 20세기 초에 몇몇 주요 인물들이 직간접적으로 제시한 '인간 증강 기술'이라는 구상은 20세기 중후반 개인용 PC, 나아가 현대의 LLM으로 이어지는 기술 발전의 방향성과 계보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증강' 개념은 컴퓨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착취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저자는 그 대표 사례로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나 개발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증강시킬 때 20세기 중반에는 LSD같은 마약, 20세기 후반에는 커피에 의존하는 모습을 꼽는다. 즉, 실리콘 밸리에서 카페는 그 이전 근대 유럽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떠는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근무지로서 엔지니어들이 연장 근무를 하는 장소이고 커피는 근무자들이 밤샘 근무 할 때 복용하는 합법적 마약과도 다름없다는 논조를 담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관점에 입각한 서술은 우리가 으레 당연하게 여기는 사상과 이데올로기들, 예컨대 능력주의나 승자독식주의 같은 편견들, 그리고 여태 자본주의가 정당화해온 경제적 구조와 사회 시스템이 우리의 시선에서 무엇을 지워버렸는가를 알려준다. 요컨대, 저자가 그려내는, 팔로 알토로 대표되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타인을 착취한 끝에 종국에는 그 착취의 여파로 인해 스스로가 붕괴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걸신들려 자기 딸까지 팔아치운 후 결국에는 자기자신까지 집어삼킨 에리식톤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같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 다른 미래는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저자는 스탠포드 내부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내달리는 과정에서 예상외의 급진적인 흐름들을 제시하긴 한다. 예컨대 20세기 초 스탠포드 대학 내에서는 급진적인 불순분자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나아가 실리콘 밸리의 기술적 산물들은 오히려 그러한 산물을 낳은 기성 체제를 비판하고 부식시키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를 대체할 미래를 제시할 때 명확한 비전과 어젠다가 따라오지 않으면 설득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아가 그러한 비전과 어젠다가 단순 수사에만 그치고 실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환멸로 이어져 일말의 가능성조차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이 같은 비판과 지적은 대부분의 사회변혁 시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는, 공허하면서도 어디에나 무차별적으로 적용가능한 전가의 보도에 그치는 비판일 수도 있다.
그렇긴 하나, 이 책은 21세기 미국을 충실히 따라가고자 하는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57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는 독자를 압도하지만, 그러한 압박을 견뎌내면 우리 사회에서 변화를 초래하는 국내외의 여러 기업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를 돌이켜볼 수 있다. 이는 비단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제와 연계된 정치, 사회, 문화 영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예를 들어 이 책은 팔로 알토로 대표되는 현대 미국 창업 및 '경제영웅' 성공 스토리가 한국의 정부와 기업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한국에 이식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우리가 얼마나 빈곤한 대안을 내세우는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슬로건을 내걸면서도 정작 자본주의라는 도식 바깥은 상상조차도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책이라고 평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으로 이 책과 덧붙여 같이 읽기 좋은 책을 추천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는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저자 룰루 밀러의 자전적 에세이인 동시에 스탠포드 대학의 초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이기도 한 이 책은 조던의 우생학적 사상을 드러낸다. 이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스탠포드 대학의 물질적, 정신적 기틀을 다진 인물로서『팔로 알토』에 꾸준히 언급된다는 점에서 스탠포드 대학을 지배하는 기풍과 정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두 번째는 미국의 한국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의 『미국 패권의 역사』다.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되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끊임없이 서진하여 태평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21세기 초기까지 서부 연안 및 텍사스 지역이 어떻게 미국 동북부 및 중서부에 버금가는 미국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는지 보다 넓은 과정에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책과 같이 읽으면 팔로 알토라는 지역을 미국 서부 지역라는 보다 넓은 공간 속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