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이렇게 줄을 많이 그은 책이 또 있을까.
맘 같아서는 책 전체에 밑줄을 긋고 싶었다.
2차 세계대전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면서 중국내 거주하고 있던 서양인들을 위현(산둥)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했는데 저자도 그 안에 수감되었다. 수용소에 살면서 보고 겪게 되는 인간의 쌩얼(민낯)을 통해 충격도 받고 고민도 하면서 깨닫게 된 얘기들(인간 본성에 관한)을 풀어서 기록한 책이다.
처음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저자는 그곳을 문명도 문화도 없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이 그곳에서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문명을 세우는 일이었다. 문명을 세우고 생존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각자가 갖고 있는 기술은 너무나 유용했고 상대적으로 철학이나 종교는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들에게 허락된 한정적인 자율로 각 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을 뽑아 이들을 중심으로 질서를 잡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게 되면서 기술로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숙소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이 움직였던 상황이라든지, 미국 적십자사에서 배달된 7박스의 먹거리가 수용소에 도착했을때 미국인들이 보여준 이기적인 태도, 또 도둑질이 잦아진 문제들이 그렇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는 기술이나 제도로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문제로만 치부될 수 없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은 신앙으로써만 극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질문 한가지. 이들을 갈등으로 몰고 간 것이 기술, 제도, 노동 그 자체인지 아니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간과함으로써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그 ‘믿음’이었는지...
인간의 기술과 노동, 제도로써 문명이 온전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수용소 생활 초창기 저자의 생각이 어리석었고 그렇기에 그것들은 인간의 삶에서 덜 쓸모있는 것처럼 인식된다면 매우 아쉬울 것 같다. 기술, 노동, 제도 등이 생존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인 것만큼 신앙의 부분과도 그만큼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신앙도 생존(생명)의 문제니까 말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기술과 노동, 제도를 맹신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매우 하찮은 ‘육적인’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결과로써 생겨나는 문제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복음과 신앙이 왜곡되는 부분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