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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ent blue
현재는 과거의 축척으로 이루어진다. 무심히 지나치는 당시의 순간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인생 안에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쌀쌀한 겨울 바닷가에 아르네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들의 삶 속에서 아르네의 존재가 어떠한 비중으로 자리 잡으리라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무지한 아이들은 외부에서 온 아르네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르네를 받아들인 사람들 또한 삶 속에서 갑자기 이탈해 버린 아르네의 공간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르네를 추억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아르네가 남긴 것은 육체가 부재한 공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잿빛 자동차를 타고 폐선 처리장에 나타난 하얀 소년은 등장만큼이나 시린 아픔을 가지고 있다. 한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과거. 아르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과거이자 배경 때문에 호기심과 동정을 동시에 받게 된다. 여기서 지크프리트 렌츠는 동정의 시선을 따스함으로 유지시킨다. 한스가 분한 화자를 통해 우린 아르네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아르네이지만 그의 작은 동작과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한스의 기억에 의해 재현된다.

한스는 아르네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르네를 기억하게 되는데 그 기억은 비단 아르네라는 인물의 한정된 기억이 아니다. 어른의 문턱에 이른 한스 자신의 성장기인 동시에 마을과 가족들의 추억이 된다. 한스의 유품 정리로서 오는 추억과 더불어 배경에서도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가 나타난다. 지크프리트 렌츠는 폐선 처리장이란 공간을 통해서 인생에서의 과거 즉, 돌아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폐선 처리장에서 종말하는 배들의 사진을 모아놓은 사진첩을 보는 아버지의 시선만 해도 그렇다.

(p.197)아버지는 늘 무언가를 더듬고 음미하는 듯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지 않나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추억을 더듬는 순간 사무쳤던 기억들 때문에 가슴이 아려 오지만 지금의 순간들이 있기까지의 작은 역사는 고철이 된 폐선이며, 어린 소년의 따스한 미소였다. 렌츠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의 소중함이 아니었을까? 한스로 통해 보여지는 아르네는 작은 것과 보잘 것 없는 것에서도 삶의 존재를 찾으려는 인물이었다.

(p.124)우리가 함께한 시간들 속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너에게서 배웠지.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무언가 말을 거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어.

이처럼 과거의 노스탤지어를 상기하는 동시에 세상을 다시 시작해 보려는 긍정적인 의미가 이 책에는 담겨져 있다. 초반 어른은 죄악이라는 그물을 던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덫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가까스로 나온 아이는 어른을 탓하며 증오하는 대신, 세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소통하려고 한다. 그 소통이 소극적인 탓에 또래의 관계 맺음에 실패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상을 향해 문을 두드린다. 언젠가 그 문이 열리겠지 하며 소망한다. 그리고 아이가 지나간 자리엔 시나브로 문이 열려 있다. 남은 사람들은 아이를 추억한다. 비단 아이의 추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토록 염원했던 희망을 감지하면서 그 문 너머를 볼 것이다. 처음부터 아르네는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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