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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준님의 서재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 17,550원 (10%970)
  • 2023-09-06
  • : 74,921

우리 작가들은 대부분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우리는 삶에서 감동적인 경험을 두세 가지 겪게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작가로서의 기술을 배운다. 우리는 두세 가지 이야기를 열 번, 독자들이 들으려고 하는 한 어쩌면 백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말한다. 물론 이야기할 때마다 새롭게 변장하면서 말이다. - 스콧 피츠제럴드(장정일 <신악서총람>에서 재인용)


사실, 이동진 평론가의 리뷰, 그리고 여기 많은 분들의 작품에 대한 디테일한 리뷰를 보면서 더 어떤 리뷰가 필요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작가의 장편소설에서의 셀프 패러디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물론 작가 자신이 뭔가 불안했는지 이례적으로 붙인 후기에서 이러한 시도를 밝히고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선 최초의 두 중편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에서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이 두 작품은 장편으로 분류되기도 하나, 분량으로 볼 때 중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어진 본격적인 장편 <양을 둘러싼 모험> <노르웨이의 숲> <댄스, 댄스, 댄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그리고 <스푸트니크의 연인>까지가 이 계열에 속한다.


그 사이에 발표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독창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일본 문단의 본격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모티브는 다시 이후의 작품에서 반복되게 된다. 특히 <기사단장 죽이기>의 절정에서의 주인공의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통과=이행' 부분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부분의 절정에서 '통과' 모티브의 재활용이라는 통렬한 비판과 함께 "하루키는 끝났다"는 평까지 받게 된다(개인적으로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세계는 분명히 다른 세계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1부에서는 '세계의 끝' 파트를 거의 그대로 쓴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후기에서 밝힌 바 대로 사실관계는 거꾸로이다. 즉, 당시 미발표 중편을 '세계의 끝' 부분에 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쉬운 점이 나타난다. 이번 작품의 1부는 참고 읽기가 매우 힘들며, 지루하다. 왜냐하면 이미 읽었던 글의 되풀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작품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경우도 있기에 이는 가혹한 평가일 수도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차라리 1부를 축약해서 프롤로그 정도로 줄이고 2부와 3부를 확장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한다. 개인적인 감상이므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지 않은 독자나 하루키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논외로 하겠다. 


하루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매우 반복적으로 셀프 패러디를 하는 이례적인 작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의 작품의 힘은 디테일에 있으며, 대단히 독창적인 걸작도 여럿 남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와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1Q84>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1Q84>가 비록 직전 작품인 <어둠의 저편>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한편, 이번 작품의 2부에서도 역시 패러디는 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주인공 소년 카프카가 홀로 떠나 도서관에 정착하고 거기서 유령을 만나는 부분이 그것이다. <도시와 불확실한 벽>에서는 주인공인 '나'가 중년이고, 카프카가 서쪽으로 간 것에 대해서 주인공이 동쪽으로 가서 도서관장 역할을 하며, 카프카가 만난 것은 '생령'(살아있는 사람의 유령)이란 점 등의 디테일은 다르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유사한 이야기들 사이에서 디테일을 살려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힘은 하루키 소설의 미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도서관은 모든 책읽는 사람들의 꿈의 공간이다. 그리고 하루키 작품에서 벽은 넘어서라고, 통과(이행=이동)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작가들을 매혹하고 작가가 평생을 통해 발전시키고 탐구하는 모티브로서 이 두 가지는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닌다. 이번 작품에서도 하루키가 반복하고 있지만 그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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