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아픈 손가락'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한다고 하지만, 각각의 다른 사연과 숨은 마음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빼떼기>는 순진이네 닭장 속 '아픈 손가락'이었던 수탉 '빼떼기'의 이야기다. 닭은 순진이네 가족이 처음 기른 가축이었다. 온 가족이 닭들이 알을 낳고, 또 병아리로 부화하는 모든 순간을 관심있게 지켜본다. 노란 암탉 턱주가리와 검은 암탉 깜둥이의 알에서 나온 서른 마리의 병아리들의 모두 가족의 기쁨이었다. 하지만 어느 겨울 날, 검은 병아리 빼떼기는 따뜻한 온기를 따라 아궁이 근처에 갔다가 크게 다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빼떼기는 더 이상 가축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가축의 역할이란, 다소 잔인하게 들려도, 건강하게 자라나 식구의 식사가 되어 주거나,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돈을 벌어다 줄 수 있어야 한다. 털이 타 버리고 부리마저 다친 빼떼기는 더 자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러나 순진이네 가족은 그런 빼떼기를 오히려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제 어미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변해버린 빼떼기는 더 이상 다른 병아리들처럼 마당을 뛰어다닐 수도, 먹이를 마음껏 주워 먹지도 못했다. 오직 순진이네 엄마의 손길과 보살핌으로 느리지만 조금씩, 천천히 성장해간다.
어찌보면, 아니 누가 봐도, 한낱 '병아리' 혹은 '가축'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미 순진이네에는 스무 마리가 넘는 병아리가 있고, 암탉이 또 알을 낳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순진이네 가족 중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순진이네 엄마는 자식을 키우듯이 그렇게 빼떼기를 키웠다. 깃털이 다 타 버린 빼떼기를 위해 추울 땐 옷을 지어주고, 잘 때는 바가지에 천을 깔고 그 안에 재웠다. 다른 집이 아니라 순진이네에서 태어난 빼떼기는 그야말로 행운아였다. 그런 가족들의 성원에 보답하듯, 빼떼기는 느리더라도 성장해 간다. 마지막으로 아쉽게 안녕을 고하기 전까지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도 흔해져 버린 지금, <빼떼기>는 오히려 낯선 신선함과 따뜻함을 준다. 닭을 가축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집에 사는 식구와 같이 관심을 가지고 소중하게 지켜본다. 느리고 더디고, 걸음걸이마저 우스꽝스러운 빼떼기는 잠깐의 관심을 끄는 신기한 존재가 아니라, 조금은 부족해도 가족과 같은 사랑과 보살핌의 대상이 된다. 작은 생명이지만 소중함은 전혀 다르지 않고, 아프고 다쳤어도 생명이 있기에 동일하게 귀한 것이다.
6·25 전쟁즈음을 배경으로 한 <빼떼기>는 다소 거칠지만 선명한 붓터치의 삽화와 함께 전개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골의 모습, 투박할지라도 따뜻한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다소 글밥이 많아 어린아이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부모님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찬찬이 읽어준다면 다른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진하게 기억될 것 같다.